브람스가 교향곡 구상에 들였던 20년은 거인과도 같던 베토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자신만의 장르를 완벽하게 구축하기 위한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1876년 완성된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은 당대의 음악가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시대의 고전이 됐다. 지난 3일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에서 함께 연주된 바이올린 협주곡과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교향곡 1번과 함께 브람스가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1870년대의 작품이다. 지금은 고전이 된 작품이지만, 발표 당시에는 시대 전환을 이끈 혁명적인 작품으로 손에 꼽혔다.
유롭스키와 레이 첸, 젊은 거장이 선보인 고전음악 세대 전환의 서막
전임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 보다 45살이나 젊은 나이로 런던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맡았던 블라디미르 유롭스키는, 맹렬한 집중력과 창조력을 바탕으로 10여 년간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테오도르 쿠렌치스, 키릴 페트렌코와 함께 유럽 오케스트라의 세대교체를 이끌었다는 평을 듣는다. 특유의 학문적 엄격함과 모험심을 겸비한 프로그램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명확하게 구축해온 유롭스키는 이제 두 번째 세기를 맞는 유서 깊은 오케스트라의 수장으로, 악단 특유의 유려하면서도 구조적인 음색을 유스키식 사운드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다듬어가고 있다.

대만계 호주인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은 유투브시대의 비르투오소다. 70만 명에 가까운 구독자를 보유한 그는 시종일관 유쾌한 모습으로 클래식 음악을 선보인다. 바이올린 활로 병뚜껑을 열기도 하며, 사운드가 건조(Dry)하다며 화장실을 찾아 연주한다. 대학가에선 상금을 걸고 챌린지를 열고, 유명 연주자들의 연주 리액션을 담은 영상을 업로드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멋진 음악과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하고 싶다”는 레이 첸은 전통적인 거장들과 다르게 콘서트홀을 벗어나 대중 곁에서 자신의 연주를 들려준다. 독보적인 그의 행보에 대해서 클래식 애호가들의 평이 갈리지만, 매 순간 자신의 연주를 발전시켜 나가며 모두가 인정하는 시대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자신만의 색깔을 명확하게 가진 음악가들이 그만큼 색채가 뚜렷한 브람스의 전성기 작품을 연주한다. 10년 만에 한국을 찾은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은 그간 정통 독일 사운드를 들려주며 관객들을 매혹시켰다. 새로운 세기를 맞는 오케스트라의 변화된 모습은 어떠할까.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가 함께하는 무대에는 볼거리와 들을 거리가 가득했다.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는 과장 없이 풍성한 질감을 표현하는 오케스트라의 장점이 드러났다. 블라디미르 유롭스키는 변주곡이 진행됨에 따라 탁월하게 박자를 조절 해가며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는데, 대편성임에도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같이 세밀한 표현으로 유머를 더해가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지난 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공연에서 지휘자 블라디미르 유롭스키와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이 협연하고 있다. / 사진출처. 빈체로
지난 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공연에서 지휘자 블라디미르 유롭스키와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이 협연하고 있다. / 사진출처. 빈체로
오케스트라가 보다 풍성한 질감으로 바이올린 협주곡의 서주를 시작하자 레이 첸은 생동감 넘치는 음색으로 음표 속에 뛰어들었다. 브람스 협주곡은 두텁고 중후한 음색을 요하기도 하는데, 레이 첸은 온 힘을 다해 보잉을 하면서도 균형감 있고 세련된 사운드를 만들었다. 기교를 드러낸 농밀한 연주로 정면승부하는 레이 첸을 위해 오케스트라도 유려한 음색으로 반주를 이어갔다. 레이 첸은 카덴차에 이르러 절묘한 완급조절로 전성기를 맞은 비르투오소의 기술력을 마음껏 뽐냈다.

공격적이고 드라마틱한 1악장이 끝나자, 서정적인 오보에 독주와 함께 2악장이 시작됐다. 온풍을 불어낸 관악기의 서주에 맞춰 레이 첸도 옷을 갈아입은 듯 감정 담아 연주를 이어갔다. 자칫 과하게 들릴 수 있는 고음 연주에서도 레이 첸은 선명하고 따뜻한 음색을 뽐냈다. 오케스트라는 그 연주에 따라 바이올린과 대화하듯 유기적인 반주로 호흡을 맞췄다. 평화롭게 대화하던 2악장이 끝나자 레이 첸은 절도있게 질주하게 시작했다. 그가 농밀한 소리로 오케스트라를 밀어붙이자 오케스트라도 구조감을 살린 유려한 음색으로 맞받아쳤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 같은 흐름 속에 레이 첸은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강렬한 소리를 뿜어냈다.

앙코르에선 본 연주의 진중함을 벗어던진, 유쾌하고 발랄한 레이 첸을 만날 수 있었다. ‘엑스트라 썸띵(Extra Something)’을 들려주겠다며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 1악장과 바흐의 파르티타 3번 3악장을 연주했다. 적절한 유머와 기교를 섞은 연주 끝에 ‘볼 하트’를 만드는 모습에 유투브 시대의 비르투오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유쾌함이 있었다.
지난 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공연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출처. 빈체로
지난 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공연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출처. 빈체로
인터미션이 지나고 시작된 브람스 교향곡 1번 연주에서 오케스트라는 드디어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힘보다 조화를 강조한 사운드는 다채로운 질감을 강조하며 디테일한 표현에 집중했다. 이는 오케스트라의 배치에서도 드러난 부분인데,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을 양쪽으로 배치하면서 보다 입체적인 표현이 가능해진 것이다. 1악장은 관악기의 하행 음형에 저항하는 현악기의 상승 음형으로 투쟁하는 듯한 느낌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유롭스키는 대결보다는 조화로운 구조를 만드는 데 집중했는데, 마치 못 없이 정밀하게 짜맞춘 목조 건축물을 만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웅장하고 거대한 석조건물과 같은 선율의 전통적인 해석과는 사뭇 다른 접근이었다.

2악장의 오보에와 바이올린 솔로는 초여름에 지저귀는 나이팅게일과 같았다. 주로 쓸쓸한 가을 달밤에 비유되는 악장이지만, 현악기와 관악기는 여름을 맞이하는 설레는 새들의 지저귐처럼 산뜻한 대화를 이어갔다. 3악장에서도 전 악장의 분위기를 이어받아 리듬에 치우치기보다 악기 간의 유기적인 호흡조절에 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막판에 이르러 속도를 조절한 유로프키는 쉼 없이 4악장의 문턱으로 연주를 이어갔다.
지난 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공연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이 연주 후 서로 인사하고 있다. / 사진출처. 빈체로
지난 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공연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이 연주 후 서로 인사하고 있다. / 사진출처. 빈체로
브람스가 클라라 슈만에게 “높은 언덕과 깊은 계곡에서 천 번의 인사를 보낸다”고 편지를 쓴 4악장은 줄곧 안개가 걷히고 빛이 드는 산골짜기의 모습으로 비견된다. 유롭스키는 거대한 선율속에 웅장함을 뽐내기보다 악기의 배치와 색감표현에 집중하며 고요한 안개를 걷어내고 펼쳐지는 아침 햇살을 만들어냈다.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는 압박을 받고 응축되기보다 서로의 메아리가 되어 조화를 이뤘다. 강렬하지 않아도 충분히 강인했던 베를린 방송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숭고함에 도달하는 방식이 해석에 차이에 있음을 증명했다.

앙코르는 첫 곡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수미쌍관을 이루듯 유쾌한 분위기의 브람스 헝가리 무곡으로 장식했다. 연주가 지속되면서 서로의 소리에 더 익숙해진 악기들은 시작보다 더 풍성한 소리를 만들어가며 공연의 마지막을 자축했다.

100년 역사의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이 블라디미르 유롭스키와 함께 선보인 섬세한 사운드는 유럽 오케스트라의 세대 전환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 블라디미르 유롭스키는 브루크너 탄생 200주년을 맞아 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7번 교향곡 연주를 음반으로도 선보였다. 세밀하고 노련한 악보 분석을 통해 새롭게 그려낸 브루크너의 교향곡에서는 마치 천사의 날갯짓 같은 유려한 사운드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 공연에서도 유롭스키는 치밀한 해석으로 브람스의 곡들을 새롭게 선보이며 오케스트라의 맞이할 새로운 세기에 대해 기대를 한껏 모았다.

조원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