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슈만 '환상곡'
F. 쇼팽 '뱃노래'
C. 슈만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S.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R. 슈만 '리스트, 헌정'
C. 드뷔시 '달빛'
‘삼대장’이라 불리며 자주 언급되는 한국 남성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선우예권은 각기 뚜렷한 개성과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한 아티스트들이다. 세 사람 모두 권위 있는 국제 콩쿠르 입상을 통해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조성진은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선우예권은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역시 한국인 최초로 정상에 올랐다. 그 뒤를 이은 임윤찬은 이 대회 최연소 우승자라는 기록을 세우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세 명 가운데 맏형 격인 선우예권은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커티스 음악원을 시작으로 줄리어드 음대와 매네스 음대에서 수학한 뒤, 독일 하노버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감성의 깊이와 명확한 구조, 세련된 음색이 조화를 이루는 연주로 잘 알려진 그는, 이번에 16년 만에 한국음악재단(Korea Music Foundation)과 한국메세나협회(Korea Mecenat Association)의 후원으로 지난 2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다시 섰다.
선우예권의 연주는 꾸밈이 없고 담백하다. 무대 위에서의 모습 역시 과장되거나 동작이 극적이지도 않다. 그가 연주하는 모습만 봐서는 작품의 극적인 흐름이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옆자리에 앉아있던 201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앤 마리 맥더모트(Anne-Marie McDermott)역시 한동안 눈을 감은 채 그의 연주에만 몰입했다. 선우예권은 슈만이 클라라에 대한 사랑과 음악적 동경을 담은 이 작품을 경계가 분명하고 정해진 틀 안에서 노래하고, 속삭이고, 폭발하며 각 악장의 뚜렷한 감성을 드러냈다.
디지털 기술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아날로그처럼 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완전무결한 테크닉이나 기계처럼 정교하게 조작된 음색은 선우예권의 연주와는 거리가 있다. 그의 음악은 아날로그이다. 일일이 수작업을 거친 장인의 작품처럼, 음원이나 CD보다는 물리적 마찰로 소리를 내는 LP에 가깝다. 선우예권은 잔잔한 물결 위를 천천히 미끄러지는 곤돌라의 선율에 짙은 우울과 체념을 담아냈고, 그 소리에는 손끝의 결이 느껴졌다.
클라라 슈만의 ‘로베르트 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Variations on a Theme by Robert Schumann)’은 한 사람의 사랑과 고통, 그리고 이별의 예감이 고밀도로 녹아 있다. 1853년, 클라라는 남편 로베르트의 43번째 생일을 맞아 남편이 1841년에 작곡한 F♯단조 주제를 가지고 이 변주곡을 작곡하여 선물했다. 선우예권은 이 작품을 단순한 헌정곡으로만 다루지 않았다. 작품에 내재된 정서의 무게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과장을 걷어내고 담백하게 풀어냈다. 소중한 누군가가 건네는 이야기처럼 선우예권의 노래는 건반을 타고 흐르며 클라라의 남편을 향한 헌신과 상실의 슬픔이 더 깊게 울려 퍼졌다.
톨스토이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처음 읽기 시작하면 한동안 중심이 보이지 않는다. 등장인물이 늘어나고, 각각의 시선을 가진 형제들의 이야기가 점입가경을 이루며 겹겹이 쌓여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의 비극을 중심으로 모든 인물의 말과 침묵, 신념과 상처가 선명한 구조를 이루며 전체 서사가 들어온다.
라흐마니노프는 삶이 순탄치 않았던 작곡가였다. 전쟁을 겪었고 극심한 재정적 압박 속에 살았다. 초기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단 두 달 만에 완성된 곡으로, 피아니스트였던 그의 다양한 스타일과 정서를 압축해 담았다. 2023년 선우예권이 내놓은 음반에도 수록된 이 작품은 슈베르트가 작곡한 같은 제목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슈베르트의 영향이 짙게 느껴진 녹턴 풍의 1번을 지나 쇼팽이 연상되던 2번에는 선우예권은 휘몰아치는 속주 위에 굳건히 버티는 주제 선율을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장송곡 풍의 3번에서는 비극적인 슬픔을 무겁고 장중하게 담은 러시아적 정서를 절절히 그렸다.
빠른 템포의 에튀드인 4번에서 선우예권은 시종일관 긴장감과 격렬함을 밀도 있게 끌고 나갔다. 왼손 옥타브의 질주와 반복 음형은 쇼팽의 에튀드 Op.10의 12번 ‘혁명’을 떠올렸고, 기술적 난이도를 뛰어넘는 격정적 클라이맥스를 폭발시켰다. 4번이 끝나자 공연 내내 숨죽이던 일부 관객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과 함께 성급한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몇 번의 커튼콜 끝에 그는 두 곡으로 마지막 이야기를 대신했다. 리스트가 편곡한 슈만의 ‘헌정(Widmung)’에서는 사랑과 헌신을 고백했고,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에서는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비추는 은빛 침묵을 남겼다. 뜨거움보다 깊은 여운으로, 선우예권은 말 없는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