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는 나에게 늘 먹빛의 한문이었다. 어릴 적 서예학원에서 배운 것은 당나라의 구양순, 안진경체였고, 한문 필획의 장중함과 붓끝의 절제가 곧 서예의 품격이라 여겼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랫동안 한글로 된 서예 작품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열린 <한글 창신전: 한글, 먹빛에 담다>를 보고 나는 놀랍도록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 붓끝에서 피어난 곡선과 점획, 여백 사이를 흐르던 먹빛. 숨죽인 전시장에서 나는 말없이 그저 멈춰 서 있었다. 가슴 안쪽에서 밀려오던 단어 하나, “경이로움”. 그것이 그날 한글서예 작품 앞에서 내가 말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전시회를 보던 나는 서예를 쓰던 과거로 순간 이동하였다.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곁에 두고 조용히 먹을 간다. 투명한 물이 벼루와 만나 검고 짙은 먹빛으로 변해가는 동안, 머릿속 번뇌도 사라진다. 붓에 먹물을 적셔 농도를 조절하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문진으로 한지를 누를 때면 마음도 어느새 가라앉는다. 하얀 화선지 위에 한 획 한 획을 그려 나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경건하고도 집중된 의례다. 손이 멈추면 호흡도 멈추고, 붓이 움직이면 마음도 움직인다. 글씨는 단지 문자가 아니라 마음의 그림자다.
2025년 1월 23일 국가유산청은 한글서예를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여기서 한글서예는 먹과 붓을 사용하여 한글을 쓰는 행위와 그에 담긴 전통 지식을 포함한다. 2024년 5월 17일, 『국가문화유산기본법』 시행과 함께 대한민국은 문화재청을 '국가유산청'으로 개편하고 문화재 명칭과 분류체계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기존의 문화재보호법, 무형문화재법 등을 통합하여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국가적 관리체계를 정비하였다. 이는 무형유산의 지속 가능성과 세계유산 등재에 필요한 행정적 기반을 강화하는 중요한 제도적 진전이었다.
국제기준과의 정합성, 문화정책 범위의 확대, 미래가치 반영이라는 필요에 따라, 『국가문화유산기본법』은 기존의 문화재보호법, 무형문화재법, 세계유산 관리법 등을 통합하여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국가적 관리체계를 일원화하였다. 이 제도적 기반 위에서 한글서예는 같은 해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공식 지정되며, 법적 정당성과 문화적 위상을 함께 인정받은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글로 쓴 서예'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를 조형예술로 발전시켜 온 전통의 맥락을 공인받은 것이다. 기존의 한문 위주의 서예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한글 자체의 아름다움과 조형성을 살려낸 예술 활동이 국가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한국 정부는 현재 한글서예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이미 중국 서예(한자)는 2009년, 몽골서예(획을 세로로 계속 연결해 써서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 냄)는 2013년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한글서예’ 역시 고유한 문자 체계와 예술성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한글서예’는 한글 창제 시기부터 현재까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어져 왔고, 다양한 기록물에 사용되어 민속사, 국어사, 음식사, 문화사, 서체사 분야의 연구에 기여하며, 우리의 고유 문자인 한글을 사용하여 이웃 나라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필법과 정제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현재에도 다양한 교육기관을 통해 전승되는 한편 다양한 예술 분야로 그 영역을 확장해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한글은 창제 원리와 철학, 음운의 조화, 자소의 조형성 등에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문자로 이미 1997년 10월 1일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미술관 소장)'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바 있다. 그런데 이는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책의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일 뿐, 이를 한글의 우수성과 바로 연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단지 언어의 기록을 넘어, 미적 질서와 사유의 흐름을 담아내는 예술 행위로 발전해 온 한글서예의 세계무형유산으로의 등재는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과 미학적 깊이를 세계와 공유하고, 아시아 문자 예술의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아가 한글을 배우려는 열풍은 이제 전 세계 곳곳에서 문화의 흐름이 되고 있다.
<훈민정음>, 조선 세종 28년(1446) / 사진출처. ⓒ KOREA HERITAGE SERVICE
케이팝과 케이드라마, 웹툰과 한국문학을 계기로 한글을 배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 관심은 문자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조형성에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인의 주목 속에서 한글서예의 유네스코 등재는 단지 전통의 보존을 넘어, 미래와 연결되는 한국 문화의 다리이자 새로운 한류의 결이 될 수 있다.
직지에서 케이팝까지, 그리고 붓 한 자락
<직지> (1377),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재, 파리 / 사진=필자 제공
한국인은 이미 활자의 힘으로 세계사에 이름을 새긴 민족이 아니던가. 직지는 1377년 간행된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 최고(最古)의 책으로, 구텐베르크보다 약 80년 앞선 출판 기술을 보여준다. 직지는 단지 기술적 선구성을 넘어, 내용을 통해 불교 사상과 공동체 윤리를 전하고자 했던 한국적 기록 문화의 집약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자와 사상의 융합은 곧 서예라는 예술로도 이어졌으며, 한글서예는 그 정신을 오늘날까지도 계승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손에 쥐는 붓은, 수백 년 전 활자와 함께 인류 문화사에 질문을 던졌던 바로 그 정신의 연장선이다. 케이팝과 케이드라마는 한국어의 리듬과 문화적 상상력을 전 세계에 전하고 있다. 이제 그 흐름에 '붓글씨'라는 깊이의 미학이 더해져야 할 때다.
한글서예는 단순히 글씨를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글자에 마음을 담고, 그 마음을 형상화하는 예술이다. 그것은 느림의 미학이자, 호흡의 예술이며, '문자'라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행위다. 세계인들이 한글서예를 쓰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우리가 함께 붓을 들고 한 자 한 자 한글을 써 내려갈 때, 세계는 다시 한번 묻게 될 것이다. 이 문자는 누구의 것인가? 한글은 우리의 것이지만, 이제는 세계가 함께 누릴 무형문화유산이다. 붓끝에서 피어난 한글서예는, 시대를 건너뛰어 전해지는 조용한 울림이자, 전 세계가 주목할 문화의 언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