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는 일찍이 인물화, 풍경화와 더불어 정물화가 주요 장르로 자리 잡았다. 영어로는 ‘스틸라이프 still life’, 독일어로는 ‘Stilleben’이라고 한다. ‘still’은 고요함이나 침묵을 의미하고, ‘life’는 생명이나 삶, 목숨, 생물체를 의미한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정물화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과는 달리 실내에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무정물(object)을 두고 생명과 시간이 정지한 세계를 그린 그림이다. 정물화의 소재는 과일, 꽃, 채소, 도자기, 유리잔, 식기, 물고기나 새, 책상보와 커튼 등으로 일상의 평범한 사물들이다. 때에 따라서는 사람, 개와 같은 살아 있는 대상도 소재에 포함된다.
이 시기 정물화는 바니타스(Vanitas)화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세속가치의 공허함, 헛됨, 가치 없음을 대변하는 썩고 부러진, 빛바랜 사물의 모습에서 우리 삶에 늘 서성이는 죽음을 상기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후 등장한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상징과 알레고리로 가득한 정물화의 고전적인 방식에 근대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며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낸다. 폴 세잔이 새로운 순수한 추상적 질서를 창조하여 20세기 현대회화의 포문을 열면서 이제 단순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진부해졌다. 그러나 탁자 위에 놓인 사물을 바라볼 때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편안함과 아름다움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존재와 미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예술가들의 과정은 여전히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물을 만들던 물질로 사물 대신 새로운 예술표현을 추구하는 공예가들이 만든 정물화는 화가들의 정물화와 무엇이 다를까?
유리 공예가 김기라의 <집>, <Still Life> 연작은 작가가 유리의 물성에 자신을 투영한 이미지다. 유리 산화물을 가마 속에 넣고 600-800℃ 가열하면 기체, 액체, 고체로 진행하는 물리적 변화를 거쳐 실온에서 다양한 물리적 특성을 띠게 된다. 작가의 창의와 개입에 따라 다양한 색채, 패턴, 질감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유리 특유의 밝음과 어두움, 강함과 약함, 투명함과 불투명함 등 물성의 정도가 유리 공예가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표현하는 시각언어의 스펙트럼이 된다.
<Still Life> 속 정물 역시 작가가 일상생활 중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사물들의 풍경에 투영해 표현했다. 별다른 변화가 없는 일상일지라도 우리가 어떤 순간에 어떤 감정, 생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존재 그리고 생이 환기되는 순간이다. 프레임 속 유리 정물은 서로 겹쳐 있다. 사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사물을 분해하듯 나열하여 사물과 사물 사이 기하학적 면들의 겹침과 그 사이의 공간을 과감히 생략하는 화법은 큐비즘을 연상시킨다.
김기라의 유리 사물 간의 겹침은 ‘기억의 겹침’이다. 유리를 통과한 빛은 색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공간의 연장, 빛의 효과가 어우러진 시각적 환영을 부른다. 파사드 안에 물리적인 형태와 빛, 색의 환영으로 이루어진 몽환적인 세계를 보고 있지만, 그것은 어린 시절 창가에서 들어온 빛이 유리병이나 구슬에 닿을 때,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고 강렬한 빛이 나를 감쌌던 따뜻한 기억의 순간을 불러낸다. 작가가 유년 시절 집에서 경험했던 어느 날 빛의 순간처럼 말이다.
김은정, <Still Life-머무르다>, 2019, 도자, 투명 레진, 목재 프레임, 개인소장
도예가 김은정은 자신의 일상에서 받은 인상을 백색의 도자기 조각을 하나하나 깎고 투명 레진 위에 담가 박제하듯 고정했다. 액자를 끼워 그림처럼 연출한 도화(陶畫) 부조다. 꽃이든 사물이든 오직 백색이다. 탈색된 듯 무색무취하고 단출한 일상의 편린이다. 어느 무명씨의 집에서도 있을 법한 사물과 세계의 상을 보고 있으면 번잡했던 나의 마음이 차분하게 내려앉는다. 이 화면 속에 꽃이 없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한 풍경인가? 계절이 바뀌면 공간에 녹색의 존재, 신선한 풀과 꽃 내음을 들여 식물의 생명력을 즐기고 취하고 싶어진다.
추운 겨울을 벗어나 다종다양한 꽃과 식물이 피어나는 봄이라면 더욱이 꽃과 식물의 생기에 눈이 간다. 화병에 꽂아 유지할 한정된 생일지라도 생물은 인조에 비할 수 없는 생생함이 있고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유연하다. 크기와 생김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자연이다. 늘 꽃을 살 때마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식물을 사서 화병 혹은 화분에 담아 물을 주며 아름다움과 생기를 즐기는 것이 맞는 것인지 자책감이 든다. 대지에서 빗방울을 맞으며 자라는 것이 그의 숙명일 텐데 말이다.
김은정, <Still Life>, 2019, 도자, 개인소장
그러나 일단 식물이 실내에 들어오면 만드는 풍경, 분위기 그리고 적막함을 밀어내는 힘을 감촉하는 것이 좋아 꽃, 식물이 있는 실내 분위기를 갈망한다. 도시의 삶이란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시간 대부분을 보내고 제대로 자연의 흙을 밟고 식물의 아름다움과 자람을 오롯이 느끼며 자연을 감촉하기 어렵다. 큰돈 들이지 않고 도시인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자연에 대한 동경, 꿈, 생기에 대한 갈구가 작은 화병에 꽂은 꽃을 꽂거나 작은 화분에 식물을 키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수식과 번잡함을 말끔히 지우고 얼음 속에 가둔 듯 박제한 ‘꽃이 있는 풍경’은 잿빛 도시 안에서 소박하고 아름다운 식물을 보듬고 희구하며 사는 우리의 초상 같기도 하다. 동시에 소박하게 식물이 주는 생명력과 그것이 들어와 건네는 평안과 분위기를 희구하는 우리의 마음을 비치는 거울과 같은 이미지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