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차린 배우 박정민…시력 잃은 아버지를 위해 귀로 읽는 소설 제작하다
한국 영화계의 보석 같은 배우가 있다. 박정민(38·사진)이다. 지난 14년간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단순한 다작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맡은 배역마다 사람들은 이전까지 기억하던 박정민을 잊었다. 몰입도 높은 연기로 오로지 ‘그 역할’로만 온전히 살아 있는 박정민을 감독들은 열정적으로 캐스팅했다.

그런 그가 지난해 말 “연기를 1년 쉬겠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활동 중단 선언이었다. 올 3월까지 남은 영화 촬영을 마치고 휴식기에 들어간 그는 돌연 출판사 대표로 돌아왔다. 박정민은 출판 담당 기자들에게 ‘기자님 안녕하세요. 배우 박정민이라고 합니다’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보냈다. 그가 운영 중인 출판사 무제(無題)에서 김금희 작가의 신작 소설 <첫 여름, 완주>를 펴내며 직접 쓴 메일이었다. 거기엔 종이책보다 오디오북이 먼저 나온 이례적인 새 프로젝트에 관한 소개가 담겨 있었다.

“저희 회사가 만든 첫 책 <살리는 일>이 출간될 즈음, 아버지께서 시력을 잃었습니다. 아들이 만든 첫 책을 보여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조금 상심했고, 아버지께 책을 선물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듣는 소설’을 기획하게 됐습니다.”

매일 아침 6시에 눈을 떠 자정 넘어서까지 책을 만들고, 알리는 일을 하는 박정민을 서울 서교동 무제 사무실에서 만났다.

▷출근하면 무슨 일을 하나요.

“책 보낼 곳 명단을 정리하고, 청소를 합니다. 오후 6시까지는 서점, 인쇄소 등 업체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어요. 무제는 대표인 저 외에 브랜드 마케터를 영입해 2인 출판사로 운영 중이거든요. 밤에는 책 홍보 글을 쓰곤 합니다.”

소설 ‘첫 여름, 완주’
소설 ‘첫 여름, 완주’
▷현재 가장 신경 쓰는 일은 뭔가요.

“<첫 여름, 완주> 홍보예요. 어떻게 책을 계속 노출할 수 있을까. 다음달엔 서울국제도서전에 나갈 예정이어서 그와 맞물린 홍보 플랜을 준비 중이에요. 그때 신간도 소개할 계획입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촬영장에 있었는데, 다른 일을 해 보니 어떤가요.

“우선 ‘촬영할 때 내가 이 정도로 열심히 한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촬영 끝나고 ‘너무 졸리다’ 싶었던 적은 별로 없거든요. 출판사 일은 마치고 집에 갈 때 잠이 막 쏟아져요. 촬영은 여럿이 하는 일이니 힘의 분배가 가능하고, 경력도 어느 정도 쌓여 요령을 알거든요. 반면 이 일은 혼자, 처음 하는 것이라 더 힘든 것 같아요. 나중에 다시 연기를 할 땐 ‘진짜, 진짜 더 열심히 해 봐야겠다’ 싶어요. 당시에도 열심히 한다곤 했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했던 것 같아요.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더라고요.”

▷이번 신간을 내면서 홍보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동안 배우로서 나를 드러내 출판사를 운영하는 게 기존 출판인들에게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있었어요. 반칙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 느낌은 아직 유효합니다. 다만 제가 우선으로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람들은 작가님들인 것 같더라고요. 나를 믿고 글을 써준 작가님들께 내가 배우로서 품위를 지키겠다고 뒤로 빠져 있는다면 이것도 좀 꼴불견이다 싶었어요. 선배 출판인들께 좀 누가 되더라도, 작가님들 챙기는 게 먼저겠다 싶어서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한 거죠.”
서울 서교동 출판사 ‘무제’ 사무실의 박정민 책장. /설지연 기자
서울 서교동 출판사 ‘무제’ 사무실의 박정민 책장. /설지연 기자
▷오디오북 기획 과정이 궁금합니다.

“2020년 무제에서 <살리는 일>을 출간하고 1년 지나서였어요. ‘다음 책은 뭘 만들지’ ‘누가 우리에게 글을 줄까’ 생각이 많았죠. 그러다 문득 ‘아버지께 책을 선물하려면 오디오북 같은 게 있어야 하겠는데’ 싶었어요. 김금희 작가님이 소설을 써주셨으면 해서 기획안과 영화 ‘아가씨’ 시나리오 발췌본을 보내드렸어요. ‘대사가 많은 소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영화 ‘헤어질 결심’에 참여했는데, 이 작품 대본이 다른 대본과 달리 문학적인 느낌이 강했어요. 내 생각과 가장 비슷한 형태다 싶었고, 지문·서술에 들어가는 문장이 아름답고 구체적이길 바랐어요. ‘헤어질 결심’은 개봉 전이었기 때문에 (박찬욱 감독·정서경 작가의 전작인) ‘아가씨’ 각본을 보내드렸죠.”

▷김금희 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복자에게> 등 그분 소설을 무척 좋아해요. 문장이 아름답고 예쁘잖아요. 그러면서도 대사는 참 우습고요.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문장과 대사가 좋았어요. 문어체인데도 구어체처럼 느껴지게 하는 매력도 있죠. 작가님이 믿기지 않게 흔쾌히 수락해 주셨어요. <첫 여름, 완주>는 유독 더 입에 잘 달라붙게 구어체로 잘 써주셔서 너무 좋았죠.”

출판사 차린 배우 박정민…시력 잃은 아버지를 위해 귀로 읽는 소설 제작하다
▷오디오북을 들은 아버지 반응은 어땠나요.

“그냥 ‘재밌더라’ 정도.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아버지도 아들내미한테 살가운 편이 아니셔서요. 그래도 ‘재밌다’고 하셔서 ‘듣긴 하셨구나’ 했습니다.”

▷이 작품 오디오북은 기존 오디오북과 많이 다릅니다. 고민시, 김도훈, 최양락, 염정아 등 유명 연예인이 성우로 참여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계절감 등 음향 효과에 공들인 티가 납니다.

“성우 한두 명이 책을 쭉 읽어주는 기존 오디오북은 진입 장벽이 있다고 봤어요. 아버지, 또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선물한다면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라디오드라마처럼 풍성하게 표현하면 재밌겠다 싶었죠. 음향 작업에만 6개월 걸렸어요. 부족한 소리는 깎고, 레이어를 쌓으면서 봄·여름 시골에 가면 들리는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어요. 시골 할머니 집에서 백열등 켜면 ‘찡’ 소리 나잖아요. 그런 것까지 들리면 좋을 것 같았어요. 음향으로 공간감과 시간, 인물의 심리·감정을 표현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오래 만졌죠. 마지막 날까지 ‘한 번만 더’ 그러면서 수정했어요.”

▷비디오 콘셉트의 책 표지도 독특합니다.

“소설 속 중요한 오브제가 비디오테이프잖아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다가 슬라이드 케이스를 발견했어요. 제 취미가 북 커버, 영화 포스터, DVD 등을 구경하며 사진으로 저장해 놓는 거거든요. 책 제작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거라 돈을 안 아끼려고 해요.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게 많아지죠. 책 케이스까지 만들려면 인쇄비, 인건비가 많이 들거든요. 반면 책 단가는 낮아요. 그럼에도 재밌게, 좋은 걸 만들고 싶었어요.”

▷배우로 번 돈을 출판업에 ‘플렉스’하는 건가요.

“아니요. 예전엔 ‘나는 책으로 돈 벌 생각 없어’라는 객기 같은 게 있었어요. ‘돈은 본업으로 벌면 되니, 하고 싶은 걸 해 보겠어’ 같은. 이제는 안 그래요. 출판사에는 최소 자본금만 투자해 놨어요. ‘배우 박정민의 돈을 끌어오지 않겠다’는 게 제 목표예요. 이 회사가 자생적으로 굴러가게 책을 많이 팔고 싶어요.”

▷책 애호가라면 읽기만 해도 될 텐데 왜 출판까지 하는 겁니까.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는데 책이라는 물리적인 성질 자체가 참 좋아요. 배우도 창작자이지만 시나리오, 감독 등 제한이 많잖아요. 영화의 톤과 매너에 맞게 연기해야 하고, 여러모로 기술자에 가깝죠. 책을 만들면 창작 욕구가 해소되는 느낌이 있어요. 내가 글을 쓰진 않지만 누구에게 맡길지, 어떻게 포장하고 편집할지 등을 정할 수 있잖아요. 내가 만든 책이 세상에 나오는 건 배우로 일할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에요.”

▷‘무제’란 이름처럼 이름 없는 것, 소외된 것을 찾아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소외된 것은 구석구석 다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박정민의 입으로 특정하는 건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책을 빌리는 거예요. 문학을 통해 은유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고, 더 직접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고 봐요. 앞서 출간한 <살리는 일> <자매일기>를 통해 동물권에 대한 화두를 던진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렇다고 ‘너희가 잘못하고 있는 거야’라며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아요. 대화를 해 보자는 거죠.”

설지연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