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페인트 업체들이 고부가가치 도료를 경쟁적으로 개발하는 등 신사업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건설, 조선, 자동차와 같은 기존 사업의 성장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해 방위산업과 배터리 등 신사업에서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서다. 10년 가까이 투자해온 특수 도료를 어느 기업이 먼저 수익화할지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방산·배터리 도료 양산 코앞
18일 업계에 따르면 노루페인트는 최근 열린 ‘2025 신제품 신기술 전시회’에서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에 투입할 스텔스 도료(RAM-1500)를 선보였다. KDDX뿐 아니라 대한항공이 개발한 드론 등 차세대 항공무기체계에도 이 도료를 투입할 예정이다. 노루페인트의 스텔스 도료는 적이 쏜 레이더 전파의 90% 이상을 흡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양국 노루페인트 연구소장은 “10%가 안 되는 소량의 전파만 반사되기 때문에 다른 레이더에 전투기가 아니라 작은 물체로 인식된다”며 “10년 넘게 연구한 성과”라고 말했다.
다만 스텔스용 도료의 문제는 전파를 흡수하는 물질이 무거워 기체 성능을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노루페인트는 전파 흡수 물질 무게를 기존 대비 20% 감량했다. 방 소장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스텔스 도료를 국산화한 것”이라며 “안정적인 공급망을 장점으로 꼽는 K방산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노루페인트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루페인트는 지난해부터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연계해 항공기 유지·보수·정비(MRO) 핵심 소재인 실란트 개발에도 착수했다. 해외에서 전량 수입 중인 실란트는 항공기 연료탱크 누설을 막고 조종실 압력을 유지해 항공기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소재다.
2차전지도 페인트업계의 새 먹거리다. 삼화페인트는 지난해 2월 2차전지에 들어가는 고순도 전해액 첨가제 제조기술 특허를 취득했다. 전지 전극 표면에 피막을 형성해 배터리 안정성을 높이고 수명을 늘려주는 기술이다. 올 3월 세계 최대 규모 배터리산업 전시회 ‘인터배터리 2025’에서 이 첨가제를 선보였다.
노루페인트는 높은 방열성으로 화재 위험을 낮추는 배터리용 난연 몰딩제를 상용화했다. 테슬라의 4680 배터리는 배터리 셀을 대폭 키워 에너지 용량과 출력을 확보한 만큼 외부 충격으로 폭발·화재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배터리 셀을 묶은 배터리팩 전반을 몰딩제로 처리하면 외부 충격에 강해지고 화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아진다. 더 많은 실리콘을 셀에 담아 배터리 셀의 충·방전효율을 높이는 고분자 바인더 기술도 연구를 마쳤다.
◇송유관·가스관·보안잉크로 확장
페인트 업체들은 보안잉크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삼화페인트는 한국조폐공사와 손잡고 위조 화폐·상품권을 가려내는 보안잉크를 개발하고 있다. 지난해 1차 공동 연구로 부착성, 내화학성을 강화한 보안잉크용 신규 합성수지와 제조법을 개발했다. 올해 진행 중인 2차 연구를 통해 본격적인 양산 체계를 갖출 계획이다. 보안잉크는 상품권, 은행권 등의 위조를 막는 데 주로 쓰인다. 최근엔 브랜드 보호, 제품 인증용 보안 라벨 등으로 보안잉크 수요가 늘고 있다. 세계 보안잉크시장은 스위스 시크파가 85%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 수익화하는 곳도 있다. KCC는 땅 밑, 해저를 지나는 송유관·가스관용 분체페인트를 출시해 판매를 시작했다. 가루 형태인 분체페인트는 휘발 성분이 없어 중독, 화재, 공해 위험이 낮은 데다 흘러내리지 않아 차세대 산업용 페인트로 부상하고 있다. KCC가 개발한 퓨전본딩에폭시(FBE) 분체도료는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에서 철근, 파이프, 밸브 등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쓰인다.
KCC 관계자는 “특히 세계 최대 석유회사인 아람코와 공동 프로젝트로 플랜트용 분체도료를 생산하고 있다”며 “차세대 성장동력이자 새로운 수출 상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