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베로날 컴퍼니 & 마르코스 모라우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 공연 / 사진. © Lorenza Daverio
라 베로날 컴퍼니 & 마르코스 모라우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 공연 / 사진. © Lorenza Daverio
로마제국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집 『오데즈(Odes)』에 등장하는 ‘카르페디엠(carpe diem)’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종종 ‘워라밸’과 ‘소확행’과 엮이지만 본래 ‘카르페 디엠’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짝을 이뤄 이야기되는 경구이다. 이 두 경구는 흑사병이 창궐했던 14세기 중세의 유럽을 대표하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과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현재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마르코스 모라우(Marcos Morau)는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를 통해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

공연 당일, GS아트센터의 로비에 마련된 무대에는 검은 천의 장막이 드리워졌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줄을 선 관객들 앞에 검은 의상에 헤드폰과 장대 마이크를 든 무용수가 천천히 다가왔고, 함께 장막 안으로 입장한다. 죽음을 상징화한 모습이었다. 마르코스 모라우는 이 작품을 ‘죽음의 춤’이라고 불리는 중세 시대의 토텐탄츠(Totentanz)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었다. 토텐탄츠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춤을 추며 산 자를 데려가는 모습을 담은 그림을 가리킨다. 프랑스어로 당스 마카브르(Danse macabre)라고도 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다루는 예술을 마카브르 예술이라고 부른다. ‘죽음의 춤’은 그림을 넘어서서 지금까지도 다양한 예술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다.
라 베로날 컴퍼니 & 마르코스 모라우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 공연 / 사진. © Albert Pons
라 베로날 컴퍼니 & 마르코스 모라우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 공연 / 사진. © Albert Pons
토텐탄츠는 종종 교회의 벽화로 나타났다. 죽음의 사신인 해골이 교황과 황제, 각종 직업의 시민들, 어린이와 아기를 데려가는 모습을 연작으로 차례로 보여줬다는 점은 중요하다. 즉,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것이다. 마르코스 모라우가 공연장이 아니라 로비에서 공연을 올리기를 고집한 명백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좌석별 등급과 높낮이 없이 누구나 똑같은 입장에서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해서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메시지에 상응하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공연의 마지막에는 죽음의 사신이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오는데 이 또한 죽음은 인간의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고 찾아온다는 점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작품에는 검은 복장을 한 3명의 무용수가 죽음의 상징이자 사신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한 명의 무용수와 사람의 크기와 모습을 본뜬 2개의 인형이 흰옷을 입고 함께 하는데 이들은 죽어가는 사람, 이제 막 죽음의 문턱을 넘은 사람을 상징한다. 유럽에는 ‘3인의 산 자와 3인의 죽은 자’ 전설과 벽화가 전해지는데, 이것은 토텐탄츠를 촉발시킨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검은 옷과 흰옷을 입은 등장 캐릭터를 각각 3인으로 잡은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무도 아닌 자들의 마지막 무도회
오감을 통해 읽는 죽음의 이미지, 21세기의 바도모리

토텐탄츠의 성격은 마르코스 모라우의 방식과 언어로 재현되었다. 이 작품이 갖는 주요한 특징은 후각, 청각, 시각, 촉각 등 관객이 신체의 감각을 동원해서 이 현장에 참여하게 만든 점이다. 제례의 뉘앙스를 갖는 향으로 공간을 채우고, 방울 소리와 턴테이블을 타고 흐르는 소리를 통해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들게 만들었다. 흙, 전등, 병원에서 사용하는 철제 테이블과 도구들 같은 오브제를 통해 연극적 요소를 더했고, 검은 옷의 무용수들은 관객에게 다가와 손을 잡으며 촉각을 통해 죽음이 우리 모두의 곁에 가까이 있다는 점을 알리기도 했다. 사진과 연극학을 공부한 모라우는 움직임보다는 무대의 상황과 맥락, 텍스트와 영상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을 이끌어냈는데, 그중 스크린에 흘러나오는 자막과 영상에는 남다른 무게가 실려있다.

토텐탄츠에는 종종 그림 주변에 라틴어로 된 시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 텍스트를 ‘바도모리(Vado Mori)’라고 부른다. ‘나는 죽음에 발을 들여놓았다’라는 뜻을 가진 바도모리는 토텐탄츠의 본질을 설명하거나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하며 죽음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즉, 이번 공연의 전반부에 스크린을 통해 나온 문장들은 이 춤에 붙여진 일종의 바도모리인 것이다.
라 베로날 컴퍼니 & 마르코스 모라우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 공연 / 사진. © Albert Pons
라 베로날 컴퍼니 & 마르코스 모라우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 공연 / 사진. © Albert Pons
후반부에는 스크린을 통해 전쟁과 살인, 참혹한 사회현상, 히틀러부터 트럼프까지 정치인들의 모습, 영화의 장면들이 뒤섞은 영상은 꽤 긴 시간 동안 보여준다. 그 장면 중에는 스페인의 영화 거장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 1900~1983) 감독과 미술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가 손잡고 만든 초현실주의 단편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의 한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여성의 안구를 면도칼로 잘라내는 장면이다. 영화의 아방가르드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이 충격적 장면은 이번 작품의 영상에서도 주요하게 등장해 인류의 발전과 평화의 뒤에 가려진 핏빛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21세기의 모순된 얼굴을 보여준다.

예술에서 초현실주의가 억압된 세계를 진실되게 드러나게 하고 개인의 해방을 꿈꾸며 등장했듯이, 영상 속에 담긴 모습들 또한 그렇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무용적 움직임보다는 시각예술로서의 면모가 강한 공연이라 이 점에 대해서는 의견과 취향이 갈릴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잘 살고 잘 죽는 기예를 향하여

죽음이 가까이 있던 중세 사람들에게는 잘 죽기 위한 준비 방법과 조언을 적은 종교서나 기도서인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가 있었다. ‘죽음의 기술’이란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도서 내용의 대부분은 잘 사는 방법인 ‘아르스 비벤디(Ars vivendi)’에 관한 것이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우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 현재,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결국 이번 작품은 개인과 사회에 메멘토 모리로 시작해서 아르스 비벤디로 가는 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이끌고 있다.
라 베로날 컴퍼니 & 마르코스 모라우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 공연 / 사진. © Albert Pons
라 베로날 컴퍼니 & 마르코스 모라우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 공연 / 사진. © Albert Pons
이단비 무용칼럼니스트·<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

라 베로날 컴퍼니 & 마르코스 모라우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 공식 트레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