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무대 위에 핀 광란의 아리아… 부산을 물들인 ‘루치아’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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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이운형문화재단과 문화재단1963의 네 번째 공동 제작 오페라
콘크리트와 철골로 지어진 폐공장에서 울려 퍼진 오페라 아리아
5월의 부산. 바람은 아직 서늘했지만, 무대 위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순간, 추위를 느낄 틈조차 없을 만큼 도니제티의 작품 속 선율은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기계가 멈춘 산업 공간 위에 인간의 목소리가 다시 생명을 불어넣었다.
지난 23일과 24일, 부산 수영구 F1963 키스와이어 센터 야외 공연장에서 열린 도니제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공간의 역사성과 예술의 힘이 만난 특별한 무대였다. 세아그룹의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이사장 박의숙)과 고려제강 산하의 문화재단1963(이사장 위미라)이 공동 제작한 이번 공연은 두 철강기업의 메세나 행보가 낳은 결실이다.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벨칸토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정략결혼과 가부장적 권력에 억눌린 여주인공이 사랑을 잃고 무너지는 자아와 광기를 그린다. 주인공 루치아와 에드가르도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다.
이번 공연은 국내 주요 오페라단에 견줄 만한 제작 역량을 보여줬다. 특히 야외 음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24채널 서라운드 음향 시스템과 무대 추적 기술을 도입, 성악가의 숨소리까지 관객에게 생생히 전달됐다. 체온 유지를 위해 관객들에게 방한용 우비를 제공한 점도 세심한 배려였다.
윤상호 연출가는 루치아의 광기를 권력에 짓눌린 인간 내면과 시대의 억압 구조를 비추는 감정으로 풀어냈다. 콘크리트와 철골로 이루어진 야외 무대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냉혹한 권력의 분위기와 루치아의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했다.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을 지휘한 데이비드 이는 각 장면의 전개마다 성악가들이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템포를 조율하며, 비극적 장면의 음악을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게 이끌었다. 특히 루치아가 플루트 선율에 맞춰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무너지는 장면에서는 소프라노 이혜정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지휘하며 성악가를 배려했다.
오페라는 관객들의 선택을 받기 위한 체질 개선이 필요한 장르다. 그런 점에서 복합문화시설로 재탄생한 산업 유산 공간에서의 공연은 의미가 남다르다. 더욱이 소음, 날씨 등 외적 제약이 따르는 야외무대에서 의상, 분장, 조명, 음향 등 복합적인 요소가 필수적인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 것은 두 문화재단의 오페라 생태계 확장을 위한 과감한 시도이다.
이해원 기자 umi@www5s.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