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명의 '천재 반항아', 보수 문화의 심장 비엔나를 뒤집어 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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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展
'전통의 벽' 깨고 새로운 미술 일궈낸
클림트, 실레, 모저, 호프만, 게르스틀, 코코슈카
6인의 작품과 삶, 그 뒷이야기
'전통의 벽' 깨고 새로운 미술 일궈낸
클림트, 실레, 모저, 호프만, 게르스틀, 코코슈카
6인의 작품과 삶, 그 뒷이야기
![빈 분리파 대표 예술가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구스타프 클림트, 콜로만 모저, 요제프 호프만,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리하르트 게르스틀](http://img.www5s.shop/photo/202412/01.38852503.1.jpg)
그랬던 빈은 20세기 초 갑작스레 유럽 미술의 최전선으로 변신한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등 전통을 현대의 자양분으로 삼아 매혹적인 미술을 만들어낸 빈 분리파 예술가들 덕분”(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다. 이 천재 작가들은 서울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탁월한 재능과 노력으로 예술의 새 장을 연 빈 분리파 대표 예술가 여섯 명의 삶과 업적을 정리했다.
①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림 값이 집 한 채 값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지만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덕분에 그는 많은 돈을 벌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추는 작품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자신감도 이런 재정적 성공에서 나왔다. 인격적으로도 훌륭했다. 에곤 실레 등 후배 예술가들을 살뜰히 챙기며 살뜰히 ‘큰형님’ 역할을 했다.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클림트를 상징하는 금박을 사용한 대형 작품은 전시장에 없다. 대신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그의 초기작들이 나와 있다. 클림트의 탁월한 기본기를 확인할 수 있는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이 대표적이다. 소형 초상화들도 만날 수 있다. ‘혁신가 클림트’가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구도와 효과를 실험한 흔적이다.


![[좌] 콜로만 모저 [우] 요제프 호프만](http://img.www5s.shop/photo/202412/01.38850635.1.jpg)
“예술이 왜 부자들만의 것이어야 하는가. 예술은 보편적인 선(善)이고,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빈 분리파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총체예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흔한 잔이나 그릇, 가구도 유화나 조각 못지 않은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게 빈 분리파 작가들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빈 디자인 공방을 만든 두 예술가가 빈 분리파의 공동 창립자인 모저(1868~1918)와 호프만(1870~1956)이다.


그 후 모저는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시장에서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인상주의와 일본 목판화 양식이 반영된 그의 회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반면 호프만의 디자인은 더욱 간결해지고 기능을 강조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클림트가 댕긴 혁신의 불씨는 그 다음 세대에서 활활 타오른다. 자연이나 인물을 사실 그대로 그리지 않고 갈등과 고독, 고뇌 등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표현주의’가 꽃피운 것이다. 그 주역은 리하르트 게르스틀,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 작품 속 뒤틀린 붓질만큼이나 이들은 과감한 사랑을 했고 강렬한 삶을 살았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 뒤에 숨겨진 세 천재 예술가의 이야기.
③ 리하르트 게르스틀
주변 사람들보다 너무 앞서나간다는 게 때로 일종의 저주가 될 때가 있다. 게르스틀의 삶이 그랬다. 그의 재능은 탁월했다. 스무 살이 채 되기 전 자신만의 표현주의적 화풍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오스트리아의 다른 예술가들을 5~10년 앞선 것이다. 전시장에 나온 ‘반신 자화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좌] 리하르트 게르스틀, 반신 자화상, 1902~1904년 [우] 리하르트 게르스틀](http://img.www5s.shop/photo/202412/01.38850730.1.jpg)
이런 그를 이해하고 아껴준 유일한 인물이 작곡가 쇤베르크다. 쇤베르크는 게르스틀을 친동생처럼 대하며 물질적·정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이 참석하는 식사나 사교 모임에 게르스틀을 자주 초대했고, 심지어 가족 휴가를 떠날 때도 게르스틀을 데려갔다.

사랑에 실패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면서 실의에 빠진 게르스틀은 자신의 작품을 대거 불태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순간 쇤베르크는 마틸데가 참석한 음악회에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몇 남지 않은 게르스틀의 작품에서 그의 천재성, 격렬하고 어두웠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④ 오스카 코코슈카

코코슈카가 일곱 살 연상의 알마를 만난 건 1912년, 스물 여섯 살 때였다. 코코슈카는 클림트가 “젊은 세대 화가 중 가장 위대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 찬사를 보낼 정도로 촉망받는 화가였다. 두 사람은 보자마자 서로에게 끌렸다. 하지만 둘의 연애는 순탄치 않았다.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알마는 수시로 바람을 피웠고, 코코슈카는 그런 알마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다. 알마는 훗날 회고했다. “코코슈카와 사랑했던 시간만큼 지옥과 천국을 여러 번 오간 적은 없었다.”
코코슈카는 알마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알마는 코코슈카의 질투와 집착에 점차 질려 갔다. 그러던 중 알마가 코코슈카와의 아이를 낙태하는 일이 벌어졌다. 코코슈카는 사랑이 이뤄지지 못할 거란 사실을 직감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됐다. 그가 갑자기 기병대에 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유다. 그 사이 알마는 예전에 만났던 남자친구, 모더니즘 건축·디자인의 산실인 독일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해 버렸다.

⑤ 에곤 실레
“그림은 잘 몰라도 실레가 천재라는 사실은 알겠다.” 실레의 그림을 직접 본 이들 중에서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유독 많다. 그만큼 그의 화풍은 독창적이고, 척 봐도 ‘이건 실레의 그림’이라고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특징적이다. 그 매력은 실레의 질풍 같았던 삶에서 자라났다.
![[좌] 에곤실레, 스스로를 보는 이 II(죽음과 인간), 1911년 [우] 에곤 실레](http://img.www5s.shop/photo/202412/01.38850815.1.jpg)
적나라한 묘사 때문에 그의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외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실레는 자신에게 솔직했고,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자신만의 색채와 선으로 그려냈다.
모델인 발리 노이칠과 동거하던 그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이유로 연인을 버리고 중산층 집안의 딸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했다. 이 시기 독일과 스위스, 체코 등에서 연 전시회가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실레의 명성도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안정과 성공이 찾아오려는 찰나, 유럽에서 총 200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 빈을 덮쳤다. 그 희생자 중 하나가 실레였다.

성수영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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