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겨울을 거치며 자연의 채근과 격려 그리고 자연의 순환 주기, 법칙에 따라 살기를 종용받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따뜻한 시기에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겨울 생존의 위기에 처한다는 우화 '개미와 베짱이’의 교훈처럼 몸과 마음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여러 준비를 하지 않으면 혹독한 겨울을 나기가 쉽지 않다. 우리 공예품에는 삼한사온의 주기로 겨울을 미리 준비하고 현명하게 살아온 한국민의 겨울나기 지혜가 절기마다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옹기,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 풍경이 정스럽고 푸근하다 / 사진. © 황인성 (대부요)
옹기,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 풍경이 정스럽고 푸근하다 / 사진. © 황인성 (대부요)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입동(立冬). 팥죽을 쑤어 붉은 팥의 기운으로 몸을 따뜻이 하는 날이다. 불운과 건강을 지키려는 한국인의 지혜로운 겨울 채비가 붉은 동지팥죽 한 그릇으로부터 시작한다. 불가에서는 붉은 팥은 광명을 상징하며, 반야 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양의 기운을 상징하는 팥죽을 그릇에 담아 장독대·부엌·헛간·우물·대문 옆 등에 놓은 다음 남은 팥죽을 들고 집 안을 돌아다니며 숟가락이나 솔가지로 팥죽을 떠 담벼락과 문짝에 뿌리는 관습도 근거 없는 일은 아니다.

소한과 대한(小寒, 大寒) 겨울부터는 아삭아삭한 식감 살아있는 채소를 섭취하기 어렵다. 요즘에는 비닐하우스와 과학적 재배로 사시사철 샐러드와 나물, 과일을 섭취할 수 있다. 하지만 예전 우리는 김치나, 찬 바람에 걸어 둔 시래기 무청과 황태, 가을부터 겨우내 말린 곶감, 밭에서 거둔 감자와 고구마 등을 준비하지 않으면 겨울에 비타민과 미네랄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땅 깊숙이 파묻어 두었던 옹기 독을 열어 살얼음 낀 동치미를 꺼내 무 숭덩숭덩 썰고 톡 쏘는 사이다 같은 맑은 동치미 국물에 국수도 삶아 만다. 뜨끈한 군고구마, 구운 가래떡과 같이 먹으면 겨울 진미가 따로 없다. 입 안이 얼얼하게 차갑고 미간이 찡긋하여도 겨울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강력한 시원한 맛이요, 감성이다.

입동(立冬) 이후 김장하는 날, 아무리 바빠도 돼지고기를 삶아 만든 수육이나 보쌈을 즐겨 먹는 것도 알고 보면 한국민이 터득한 겨울나기 지혜다. 김장 김치와 함께 보쌈을 먹는 것은 발효된 김치의 유산균과 돼지고기의 단백질을 함께 먹는 방법이다. 돼지고기는 한방으로 따뜻한 기운이 있어 몸을 따뜻하게 해주니 맛과 건강을 한 번에 얻는 일거양득이다. 선인들로부터 내려온 절기별 식문화를 살펴보면, 그중에 지혜롭지 않고 근거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황인성, 푸레찻독(2023) / 사진. © 황인성(대부요)
황인성, 푸레찻독(2023) / 사진. © 황인성(대부요)
이 모든 것과 어울릴 우리 겨울나기 공예품을 하나만 꼽아보라면, 옹기(甕器)가 제격이다. 숨을 쉬는 '옹기’의 효능이야 익히 알려진 바이다. 우리나라 식문화에서 빠지면 안 될 3대 필수장인 된장, 간장, 고추장의 제조와 보관뿐 아니라 김치로 대변되는 한국 식문화는 과연 '옹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아무리 김치냉장고의 성능이 뛰어나고 편리하다 하나, 대기업에서 지속해서 옹기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있고 플라스틱을 대신할 보관 용기를 옹기로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신기술로도 대체 불가한 옹기 특유의 맛과 정서의 힘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시중 가장 인기 있는 식기는 백자(白磁)다. 백자는 발색과 강도가 좋아 사용성이 좋고 상차림도 환하게 만들어준다. 형형색색 식재료와 붉은 양념이 많은 한식의 배경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러나 백색은 깨끗해도 왠지 재미가 없다. 옛 어머니들은 옹기를 독뿐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기물, 식기로 사용했다. 요즘은 옹기를 현대화, 새로운 생활에 맞게 예술화하려는 작가들의 시도가 많다. 지역별 기후와 식문화, 그 땅-흙의 성질에 맞게 연구를 거듭하고 디자인 감각도 더해 새로운 옹기를 만들고 있다.

옹기의 유약은 가마 속에서 태운 재(灰)를 채취해다가 여러 날 물에 넣고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을 체에 걸러 사용한다. 생산성을 높이고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반짝거리게 만든 광명단 옹기는 옛말이다. 요즘은 건강에 좋은 재료와 제작법으로 옹기를 만든다. 천연 유약을 고온의 불로 구워 예전보다 단단함도, 색채도 좋아졌다. 요즘은 도예가들은 불을 때는 과정에서 벗겨지지 않는 그을림(炭化)을 입혀 전통 옹기와 비교해 색이 좀 더 어둡고 다소 금속과도 같은 표면을 도출하기도 한다. 작가들이 뜻을 모아 명맥이 끊어졌던 제주지역 옹기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 모두 장독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시대의 새로운 예술, 쓰임으로 옹기를 제작하려는 의미있는 창작이다.
[좌] 황인성, 푸레찻독(2022) [우] 황인성, 푸레찻독(2023) / 사진. © 황인성(대부요)
[좌] 황인성, 푸레찻독(2022) [우] 황인성, 푸레찻독(2023) / 사진. © 황인성(대부요)
배연식, 푸레도기(2023) / 사진. © 배연식
배연식, 푸레도기(2023) / 사진. © 배연식
옹기의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대부분 아파트 생활이라 집안에 옹기 독을 놓고 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장독 말고도 식탁 위에서 부릴 옹기의 장기는 무궁무진하다. 전을 노릇노릇 큼지막하게 부쳐 내놓을 때, 질그릇 특유의 갈색빛만큼 노란 전을 한층 맛깔나게 돋우는 그릇이 드물다. 명창의 노래에 추임새 잘 넣는 고수 같다. 동치미에 말아낸 냉국수나 떡국, 만둣국 등 백색 음식에도 옹기가 뒷배 역할을 제대로 한다. 어두운 배경이 화려한 고명과 함께 뽀얗게 우러난 국물의 색과 질감을 안아주고 맛깔스럽게 한다. 덤벙덤벙 수육 썰어 김치와 곁들인 고기 한 상에도 질그릇 특유의 두툼하고 투박한 미감은 잘 어울린다. 모름지기 같은 음식이라도 담아내는 그릇에 따라 맛과 향은 물론 건강 효과까지 달라지는 법이다. 굳이 장류나 김치와 같이 발효시켜 만든 식품이 아니더라도 대체로 옹기는 한식과 궁합이 좋다.
옹기는 한식의 형형색색 재료를 보듬고 돋보이게 하는 바탕 역할을 충실히 한다 / 사진. © 지요한(unrealstudio)
옹기는 한식의 형형색색 재료를 보듬고 돋보이게 하는 바탕 역할을 충실히 한다 / 사진. © 지요한(unrealstudio)
누가 요즘 음식을 생존 혹은 배고픔을 해결하려 먹는가? 우리가 느끼고 표현하는 맛에는 무엇보다 '추억'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짜장면을 보면 졸업식이나 이삿날이 떠오르고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에서 어머니의 맛이 느껴진다. 우리가 느끼는 맛의 형용은 8할 혀끝보다 머리가 좌우한다. 우리의 미각과 후각의 감각은 우리를 음식과 연결된 인생의 특정한 순간, 상상의 세계로 데려간다. 그릇과 음식이 서로 합을 맞추어 맛을 돋우고 추억, 정서를 부른다.
[좌] 허진규, 옹기 수레질항아리(2015) [우] 허진규, 봄나들이(2015) / 사진. © 허진규
[좌] 허진규, 옹기 수레질항아리(2015) [우] 허진규, 봄나들이(2015) / 사진. © 허진규
음식뿐 아니라 그릇에도 어울리는 제철이 있다. 나는 유독 겨울에 옹기그릇에 음식을 담을 때 그에 어울리는 추억과 정서를 함께 식탁에 내어놓는 기분이다. 굳이 시골 출신 아니더라도, 겨울 많은 눈이 내리는 날 옹기그릇을 보면 어느 집 장독대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 풍경이 떠오른다. 생각만 해도 포근하고 친근하다.

어릴 적 나의 어머니는 눈이 와서 바깥에 나가지 못하는 날, 그 해 수확한 감이며 고구마, 밤, 옥수수 등을 항아리에 보관해 두었다가 겨울 간식으로 내주셨다. 한겨울에 맛보기 힘든 지난 계절의 수확물을 형제와 경쟁하며 허겁지겁 맛있게 먹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살뜰함과 수고로움, 마음을 뒤늦게 가늠한다. 그립다. 그 옛날 독 안에 쟁겨 두던 먹거리와 살림 채비가 동이 날 즈음, 겨울을 보내고 봄을 기다리는 어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지금 내게 옹기 장독대는 없다. 그 대신 한 겨울 각자의 겨울나기에 분투할 식구들을 위해 테이블 위에 옹기 채반을 꺼내고 감과 귤을 넉넉하게 담아 내어둔다. 용처와 사물의 모양이 달라도 그 안에 담는 인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홍지수 공예 평론가•미술학 박사•CraftMIX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