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갇힌 소피아 바시.
감옥에 갇힌 소피아 바시.
탕, 탕, 탕, 탕, 탕.

1968년 1월 3일 멕시코 남서부의 휴양지 아카풀코의 고급 주택가에서 다섯 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한 중년 여성이 동네 경찰서를 찾았습니다. 그녀의 정체는 유명 화가 소피아 바시(1913~1998). 바시가 경찰관 앞에서 담담하게 내뱉은 말은 멕시코를 뒤흔들었습니다. “자수하러 왔습니다. 제가 실수로 사위를 총으로 쏘는 바람에 사위가 죽고 말았어요.”

곧바로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바시와 그의 변호인은 “가족 모임을 하던 중 사냥용 총을 만지다가 실수로 총이 발사됐다. 불의의 사고였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 사건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았습니다. 발사된 총알은 총 다섯 발. 순간의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숫자였습니다. 게다가 사위의 상처는 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마치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이 상대방을 반드시 죽이려는 의도로 총을 쏜 것처럼요. “일부러 쏜 게 분명합니다. 의도적인 살인입니다.” 검찰은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법원은 검찰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의도적인 살인에 징역 11년이 선고됐고, 바시는 항소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멕시코 사회의 반응이 의외였습니다. 사람들은 수군댔습니다. “바시는 죄가 없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앞다퉈 바시를 석방해달라는 탄원서를 정부에 보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은 바시, 그리고 멕시코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바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그리다

잠깐 미술 이야기를 해 볼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20년대, 세계 미술계가 가장 주목하는 화가 그룹을 하나만 꼽는다면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 권위 미술전인 베네치아비엔날레가 이들을 집중 조명(2022년)했고, 미술시장에서 가장 가파르게 가격이 뛴 그림들도 이들의 작품이니까요.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화가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멕시코 출신이거나, 멕시코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는 겁니다. 왜 멕시코는 이렇게 ‘초현실주의 명가’가 된 걸까요. 멕시코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나초, 타코, 선인장 같은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 남미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이 발달한 땅입니다. 예컨대 문학에서 남미는 현실과 환상을 뒤섞은 ‘마술적 사실주의’로 유명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표작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남미의 역사와 초능력, 주술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지요. 미술에서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상처입은 사슴'. 자신의 얼굴과 사슴의 몸을 결합한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초현실주의로도 볼 수 있다. 앙드레 브르통 등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했던 이유다. 하지만 칼로는 이런 분류를 매우 싫어했다.
프리다 칼로의 '상처입은 사슴'. 자신의 얼굴과 사슴의 몸을 결합한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초현실주의로도 볼 수 있다. 앙드레 브르통 등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했던 이유다. 하지만 칼로는 이런 분류를 매우 싫어했다. "나는 내가 처한 현실을 그대로 그렸을 뿐"이라는 게 칼로의 설명이었다. 이는 남미 특유의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분위기, 그리고 이를 그대로 표현하는 '마술적 리얼리즘'과도 연결된다.
이런 특징은 남미의 특이한 전통과 역사에서 나왔습니다. 다른 대륙들에 비해 남미에는 죽은 자와의 교감, 주술, 꿈의 해석 같은 고대 문명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불과 수백 년 전까지 남미 대륙을 호령하던 마야·잉카·아즈텍 문명의 영향입니다. 여기에 유럽 기독교 문명의 갑작스러운 침략이 더해지면서, 남미는 일종의 기묘한 문화적 ‘짬뽕 상태’가 됐습니다. 샤머니즘과 주술, 계몽주의와 기독교 교리가 함께 존재하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여기에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더해지면서, 남미는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 됐습니다. 평범한 현실을 뛰어넘은 현실. 초(超)현실적 공간이 바로 남미였습니다.

바시의 사건도 그런 의미에서 초현실적이었습니다. 1913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바시는 세 자녀를 둔 부잣집 사모님. 51세가 되던 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학교를 찾아간 바시에게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인, 당신은 이미 예술가입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지금 당장 그림을 그리세요.” 그렇게 늦깎이 화가의 길을 걷게 된 바시의 그림은 미술계에서 인기 만점. 그녀의 그림은 서정적이면서도 몽환적이었고,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덕분에 오히려 더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데뷔 후 불과 4년 만에 그는 미술계에서 유명 인사가 돼 있었습니다. 멕시코는 물론 미국, 유럽에서도 전시를 열 정도로요.
소피아 바시 '황폐'(1968).
소피아 바시 '황폐'(1968).
바시 '바다 옆'(1965). /개인소장
바시 '바다 옆'(1965). /개인소장
1968년 바시가 저지른 사건이 멕시코에서 큰 화제가 됐던 것도 그가 유명한 화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휴양지의 고급 주택에는 바시 부부와 자녀들, 그리고 사위가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바시는 사건 직후 경찰에 자진 출두해 자신이 사위에게 총을 보여주려다 실수로 총이 발사됐고, 이로 인해 사위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법원은 바시가 의도적으로 사위를 죽였다고 판단했고, 11년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세간에 퍼진 소문은 법원 판결과 달랐습니다. 사실 사위를 살해한 건 바시의 딸인 클레어였지만, 바시가 딸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썼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멕시코에 널리 퍼졌던 소문은 이랬습니다. 온 가족이 모여 휴가를 보내던 중, 사위는 바시의 늦둥이 막내아들에게 눈독을 들이게 됩니다. 멀쩡한 줄 알았던 사위는 사실 소아성애자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족의 눈을 피해 막내를 성(性)적으로 학대하던 사위. 그 광경을 본 딸은 격분해 총으로 사위를 쏴 죽였습니다. 바시는 그런 딸을 감쌌습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딸은 법에 따라 사위의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게 됩니다. 딸이 살인자가 되고 출소 후에도 가난하게 사느니, 바시는 차라리 스스로 살인자 취급을 받기로 했습니다. 법정에서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고 항소하지 않은 것도 딸이 진범이란 사실이 밝혀질 게 두려워서였다는 얘기였습니다.

몇 년 뒤, 딸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도 딸은 목숨을 건졌지만, 평생 시력을 잃었고 유서는 행방불명됐다고 합니다. 당시 소문에 따르면 유서에는 “내가 진범”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뒷이야기와 소문들 때문에 바시와 멕시코 전역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바시는 죄가 없다”며 탄원 운동을 벌였지요.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습니다만 바시가 무죄라는 이야기는 단순한 소문이나 풍문 수준은 아니었고, 법적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딸에게 죄를 묻기에는 증거가 부족했고요. 여론과 여러 사정, 바시의 모범적인 수감 생활 덕분에 그녀는 복역 4년 반만인 1972년 가석방돼 출소했습니다.
소피아 바시 '세상의 눈물'(1974).
소피아 바시 '세상의 눈물'(1974).
소피아 바시 '먼지에서 먼지로'(1968).
소피아 바시 '먼지에서 먼지로'(1968).
사건 이전에는 몽환적인 풍경과 상징적인 이미지가 주를 이뤘던 그의 작품은, 수감 이후 내면의 고통과 감정의 깊이를 담게 됐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섬뜩하면서도 꿈결 같은 풍경 속에서 조용히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존재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죄책감과 억울함 등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지만, 그 사연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듯이.

출소 이후 그는 딸과 함께 살며 국제적인 예술가로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세계 인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1991년에는 멕시코 정부에서 공로 메달을 받기도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바시는 1998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작품은 멕시코시티 현대미술관,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텔아비브 현대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소장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소피아 바시 '무제'(1983). 지난해 10월 한국에서도 전시됐던 작품이다.
소피아 바시 '무제'(1983). 지난해 10월 한국에서도 전시됐던 작품이다.

레메디오스 바로, 그리움을 그리다

멕시코는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땅이기도 했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 레메디오스 바로(1908~1963)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레메디오스 바로.
레메디오스 바로.
레메디오스 바로 '탑을 향하여'(1961). 어린 시절 받았던 억압적인 교육을 표현한 그림이다. 수녀를 따라 가는 학생들 속, 한 학생만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바로 자신이다.
레메디오스 바로 '탑을 향하여'(1961). 어린 시절 받았던 억압적인 교육을 표현한 그림이다. 수녀를 따라 가는 학생들 속, 한 학생만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바로 자신이다.
레메디오스 바로 '파열'(1955).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가는 인물을 감시하고 있다.
레메디오스 바로 '파열'(1955).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가는 인물을 감시하고 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바로는 어릴 때부터 예술, 그리고 미신과 신비주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녀를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엄격한 학교에 집어넣었습니다. 수녀원 학교에서의 억압적인 생활은 바로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줬고, 이는 사춘기 특유의 감성과 만나 여러 재미있는(하지만 부모에게는 피곤한) 상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어쨌거나 바로의 삶은 대체로 순탄했습니다. 그녀는 1924년 마드리드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인 1930년에는 대학 동창이자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남자와 결혼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습니다.

하지만 바로가 스물여덟 살이던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그녀의 삶을 비극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의 가족도 20만명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이 끔찍한 내전에 휩쓸렸고, 이로 인해 바로는 영원히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습니다. 바로가 머무르고 있던 파리의 상황도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바로는 파리를 떠나야 했고, 결국 그녀는 멕시코로 가는 배를 타게 됐습니다. 그렇게 바로는 고국과 가족을 영영 잃었습니다. 바로의 그림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떠도는 사람들, 떠다니는 배,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 슬픔을 나타냅니다.
레메디오스 바로 '새의 창조'(1957). 고향에 다시는 갈 수 없는 자신의 슬픔을 담은 듯, 새를 만들어 세상에 보내는 여인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새들은 바로 자신이 잃어버린 과거와 가족을 상징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레메디오스 바로 '새의 창조'(1957). 고향에 다시는 갈 수 없는 자신의 슬픔을 담은 듯, 새를 만들어 세상에 보내는 여인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새들은 바로 자신이 잃어버린 과거와 가족을 상징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레메디오스 바로가 제약사 바이엘에 그려준 그림. 허리 통증에 잘 듣는 진통제 광고에 쓰였다. 바이엘 제약은 이런 광고 문구를 붙였다.
레메디오스 바로가 제약사 바이엘에 그려준 그림. 허리 통증에 잘 듣는 진통제 광고에 쓰였다. 바이엘 제약은 이런 광고 문구를 붙였다. "마치 살에, 관절에, 뼈에, 신경에 날카로운 못이 박히는 것 같아. 류머티즘... 요통... 좌골신경통...!!"
그렇다고 바로가 마냥 슬픔에 잠겨 살았던 건 아닙니다. 55세이던 1963년 건강 악화로 갑자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계속 그림을 그렸고, 멕시코를 대표하는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습니다. 유명 화가이던 그녀는 제약사에 광고용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습니다.

바로는 멕시코에 있는 다른 화가들과도 친밀한 관계로 지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프리다 칼로와 그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 그리고 바로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동료이자 멕시코에서 삶과 예술을 함께 공유했던 영국 출신 화가 레오노라 캐링턴(1917~2011)이 대표적입니다.
레메디오스 바로 '부활하는 정물'(1963).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다.
레메디오스 바로 '부활하는 정물'(1963).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다.

레오노라 캐링턴, 고통을 그리다

캐링턴은 1917년 영국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네 살 때 이탈리아 피렌체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고, 런던으로 돌아와서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초현실주의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리고 캐링턴은 스무살 때인 1937년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뜨거운 사랑에 빠져 프랑스 파리로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레오노라 캐링턴.
레오노라 캐링턴.
하지만 1940년대 초,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 에른스트는 프랑스의 적국인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체포됩니다. 캐링턴은 에른스트를 망명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에른스트는 구제불능의 바람둥이였습니다. 좋았던 캐링턴의 팔자는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합니다. 잠시 몸을 피했던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캐링턴은 불안한 현실, 그리고 더 불안한 연인과의 관계 때문에 심각한 불안증, 공황 장애와 망상 증상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캐링턴은 정신병을 진단받아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됩니다.
레오노라 캐링턴 '자화상'(1937~1938).
레오노라 캐링턴 '자화상'(1937~1938).
레오노라 캐링턴 '맞은편 집'. 정신병원에서 겪었던 감금과 두려움의 기억을 상징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
레오노라 캐링턴 '맞은편 집'. 정신병원에서 겪었던 감금과 두려움의 기억을 상징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
당시 스페인은 파시스트 독재 정권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사회 전반에 폭력이 만연하던 시대. 아마도 캐링턴은 정신병원에서 참담한 학대를 겪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캐링턴은 이때의 경험에 대해 평생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그림에 괴물, 환상, 어두운 복도의 이미지들로 내면의 공포와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캐링턴은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멕시코로 도망치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그는 멕시코시티를 중심으로 삶과 예술을 이어갔습니다. 살바도르 달리를 비롯한 남성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여성의 몸을 그림 소재로 활용했던 것과 반대로, 캐링턴은 여성의 관점에서 초현실주의를 다뤘습니다. 작품 활동은 물론 여성의 인권 운동에도 힘쓰던 캐링턴은 2011년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그는 여성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레오노라 캐링턴 '연인들'(1953).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로 보이는 연인이 신비로운 장소에서 만나는 장면을 그렸다. 연결, 탈육체적 사랑, 꿈과 현실의 중첩 등 그가 좋아했던 주제들이 표현돼 있다.
레오노라 캐링턴 '연인들'(1953).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로 보이는 연인이 신비로운 장소에서 만나는 장면을 그렸다. 연결, 탈육체적 사랑, 꿈과 현실의 중첩 등 그가 좋아했던 주제들이 표현돼 있다.
소더비 경매에서 영국 여성 작가 사상 최고가 기록을 쓴 레오노라 캐링턴의 '다고베르트의 구역'. 7세기 프랑크왕국의 왕인 다고베르트의 퇴폐적인 삶을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1995년 소더비에서 47만5500달러에 낙찰됐던 이 작품은 29년만에 60배 오른 389억원에 낙찰됐다.
소더비 경매에서 영국 여성 작가 사상 최고가 기록을 쓴 레오노라 캐링턴의 '다고베르트의 구역'. 7세기 프랑크왕국의 왕인 다고베르트의 퇴폐적인 삶을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1995년 소더비에서 47만5500달러에 낙찰됐던 이 작품은 29년만에 60배 오른 389억원에 낙찰됐다.

초현실주의, 말할 수 없는 것들

초현실주의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보통 비현실적인 풍경입니다. 환상적이고, 현실 도피적이고,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것 같은…. 하지만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른 화풍의 화가들보다 삶이 굴곡진 사람들이 오히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망명, 수용소, 감옥, 병상 등 삶의 여러 괴로움을 겪었던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그랬듯이요.

그들에게 그림은 유일한 언어였습니다. 너무나 아파서,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기억들은 초현실의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이들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초현실주의는 말 그대로 현실을 뛰어넘으려는(超) 시도. 작가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위로받고자 했습니다.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나 고통이 있습니다. 말과 글 외에도 미술이나 음악, 춤 같은 다른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요. 바시와 바로, 캐링턴은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들의 신비로운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게 됩니다. 조금은 기괴한 초현실주의 그림들이 시대를 넘어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끌어당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레메디오스 바로 '세 개의 운명'. 한 명은 글을 쓰고, 한 명은 그림을 그리고, 한 명은 술을 마신다. 각자는 다른 두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이들의 운명은 세 인물을 감싸고 있는 복잡한 도르래 시스템으로 얽혀 있다. 바로는 결정론, 즉 모든 사건은 이미 존재하는 원인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는 사상에 매료돼 있었다.
레메디오스 바로 '세 개의 운명'. 한 명은 글을 쓰고, 한 명은 그림을 그리고, 한 명은 술을 마신다. 각자는 다른 두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이들의 운명은 세 인물을 감싸고 있는 복잡한 도르래 시스템으로 얽혀 있다. 바로는 결정론, 즉 모든 사건은 이미 존재하는 원인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는 사상에 매료돼 있었다.
바시 '자화상'(1982).
바시 '자화상'(1982).
**이번 기사는 Remedios Varo, Unexpected Journeys(Janet A. Kaplan 지음), The Surreal Life of Leonora Carrington(Joanna Moorhead 지음), 멕시코 언론 기사, vlex 판례 분석(El caso de Sofía Bassi)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7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앞서 다뤘던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들은 두 권의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과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으로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