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가려 받으라는 거냐"…워싱턴 로펌들 '부글부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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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대형 법률회사(로펌)들을 겨냥해 제재하는 행정조치를 잇달아 내리면서 미국 로펌들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문화전쟁’의 한복판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좌파 몰아내기’ 문화전쟁
자신에 대한 수사 관계자들에 대한 보복을 공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총 폴 와이스 등 대형 로펌들을 강력하게 제재하는 내용의 행정조치(명령)를 줄줄이 발표했다. 자신을 수사한 로버트 뮬러 검사를 지원한 로펌,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 정적들과 가까운 로펌 등이 주요 대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이 법적절차를 “무기화” 했으며, 미국의 이익을 훼손하고 다양성 조치로 인종차별적인 결정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보복 방식은 상당히 치밀하고 구체적이다. 해당 로펌의 연방정부 계약을 검토해서 끊는 것은 물론, 정부 건물에 출입을 못하게 하고 직원들과 만날 수 없도록 하는 등이다. 법률 시스템 남용을 막겠다면서 모든 로펌을 대상으로 “국가안보, 공공안전, 선거 청렴성을 위협하는 행위를 제한”하라는 명령도 추가했다.
밥줄이 끊길 위기에 처한 로펌들은 줄줄이 ‘백기투항’을 선언하고 있다. 첫 행정조치 대상이었던 폴 와이스(변호사 1000명 규모)는 백악관과 협상 끝에 정부의 주요 의제(반유대주의 퇴치 등)를 지원하는 데 4000만달러 상당의 무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합의해서 백악관의 행정조치 철회를 얻어냈다.
아직 행정조치 처분을 받지 않은 대형 로펌들도 트럼프 정부와 ‘선제적 합의’에 나서고 있다. 1700여명 변호사가 일하고 있는 스캐든압스슬레이트미거앤드플롬은 1억달러 규모 법률서비스 제공을 약속해 갈등을 미리 예방했다. 스캐든압스는 2020년 대선에 대해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친 디네시 드수자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의 무료 변론을 담당했다.
4000명 변호사를 거느린 초대형 로펌 커클랜드앤드엘리스는 제프리 로즌 전 법무부 차관 등 트럼프 1기 행정부 주요 고위 관료들을 여럿 배출했지만, 다양성 조치를 이유로 트럼프 정부의 압박을 받고 있다. 이 회사는 행정조치를 피하기 위해 로비스트를 고용하고 별도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도했다.

◆500개 로펌 연판장 제출
법조계 일대에선 “고객을 가려 받으라는 말이냐”는 불만이 끓고 있다. 자의적인 잣대로 트럼프 정부가 과도한 조치를 내리는 것은 위헌적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조치를 한 로펌 중 퍼킨스코이, 제너앤드블록, 윌머헤일 3곳은 트럼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일단 집행 중단 조치를 상당부분 받아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사건을 담당한 판사를 겨냥해 “부패했다”고 저격하는 등 반발했다.특히 지난 4일 퍼킨스코이 소송전에는 500곳에 달하는 로펌들이 “이 소송의 결과에 우리도 영향을 받는다”는 취지의 서명을 제출했다. 이 사건이 퍼킨스코이 만의 문제가 아닌 만큼, 판사에게 전향적으로 판단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종의 연판장이자 탄원서다. 퍼킨스코이는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을 대리했던 회사로 1000여명의 변호사가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소수다. 대부분의 로펌은 현 상황을 우려하면서도 최대한 몸을 사리는 중이다. A 변호사는 “고객을 가리지 않아야 하고 수수료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로펌의 본성인데 현재는 아무래도 눈치를 보게 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다른 로펌 소속 B 변호사는 “트럼프 정부에 대항하는 로펌의 명단이 엑셀파일 형태로 돌아다니고 있다”면서 “미국에서는 원래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하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고 전했다.
현지 변호사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움직임이 수년 전부터 준비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B 변호사는 “트럼프 대통령은 대학과 로펌이 젊은이들에게 진보 사상을 주입시키고 이런 논리를 사회에 전파하는 주요 경로라고 이해하고 있다”면서 “두 영역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꾸준히 있었고, 취임 즉시 실행에 나선 것”이라고 해석했다.
콜럼비아대 등 주요 대학에 연방정부 자금지원을 묶는 방식으로 항복선언을 받아낸 트럼프 대통령이 로펌을 대상으로 벌이는 전쟁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미래의 정치적 토양을 결정하기 위한 문화전쟁의 성격이 강하다는 설명이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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