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100가지 이야기로 다시 만나보는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가다. 2021년 KBS클래식FM은 2002명을 설문조사해 한국인이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 6619곡을 뽑았다. 1위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였다. 교향곡 5번 ‘운명’(10위),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12위), 교향곡 9번 ‘합창’(13위) 등 베토벤의 다른 곡도 상위권이었다. 어디에서나 사랑받다 보니 베토벤은 명곡보다 명반을 가리는 게 일이다. 세상에 나온 그의 음반만 1만5000여 장. 클래식 음악 입문자에겐 헤엄칠 엄두가 안 나는 망망대해다.

영국 음악계의 전설적 평론가인 노먼 레브레히트가 쓴 <왜 베토벤인가>가 최근 국내에 출간됐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종종 평론을 기고하는 레브레히트는 구스타프 말러의 곡을 다룬 책 <왜 말러인가>를 2010년 펴내 음악적 식견을 입증받은 인물이다. 저자는 베토벤의 720여 곡 중 250여 곡을 추린 뒤 100개 주제를 기준으로 나눠 담았다. 여기에 곡별로 뛰어난 해석을 한 연주자는 누가 있는지 함께 다뤘다. 작곡가 인생에 집중하는 음악 평전은 피했다. 베토벤의 삶이나 음악사는 곁들이로 나온다.
[책마을] 100가지 이야기로 다시 만나보는 베토벤
주제 100개 사이엔 뚜렷한 연결고리가 없다. 주제 하나에 짧으면 2쪽, 길어야 16쪽 분량이어서 어디서든 편하게 골라 읽기 좋다. 독자가 한입에 베토벤을 음미할 수 있도록 까다로운 음악 어휘나 이탈리아어 표현을 쓰는 것을 자제했다. 대신 괴테, 프로이트, 클림트와 같은 다양한 인물의 일화나 해석을 활용해 베토벤 곡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데 집중했다. 이 책의 영어판 부제가 ‘100가지 단편(pieces)으로 본 현상’이 된 배경이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다룬 31장을 보자. 상하이음악원 객원교수인 저자는 중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베토벤 노래로 이 곡을 꼽는다. 곡명 속 ‘엘리제’는 지금도 정체가 미궁이다. 저자는 엘리제가 ‘테레제’를 잘못 읽은 것이란 1950년대 가설을 빌려온다. 연주 사례로 피아니스트 랑랑을 다룰 땐 평가가 매섭다. 랑랑이 “머리를 과하게 흔들고 요란한 팔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고 해석한다. 저자는 이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중국 꼬마에게 “음이 틀렸다”고 지적받은 일화도 소개한다. 다만 베토벤이란 개인의 맥락에 관해선 깊게 다루지 않는다.

베토벤의 인생사는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38장은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을 다룬다. 저자는 베토벤을 후원한 귀족 발트슈타인이 거창한 교향곡이 아니라 소나타를 헌정 받자 화를 낸 일화를 소개한다. 14장에선 베토벤의 처세술이 빛난다. 그는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리에게 호감을 사고자 그의 오페라에 나오는 주제로 변주곡을 만든다. 10장에선 베토벤과 괴테가 함께 산책하다가 오스트리아 황제를 우연히 만났다는 내용의 야사를 소개한다. 괴테는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 황제에게 인사한다. 반면 베토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냥 지나간다. 예술가는 권력가에게 굴복해선 안 된다고 여겨서다.

각 장 말미마다 저자는 연주자들을 추천한다. 이들의 해석이 어떻게 다른지도 짤막하게 설명한다. 때론 레너드 슬래트킨이나 사이먼 래틀 같은 현대 음악가의 말을 빌려오기도 한다. 책 속에 인쇄된 QR코드를 카메라로 찍으면 추천 녹음본을 들을 수 있다. 독서 난도는 꽤 높다. 고전주의와 현대를 넘나들다 보니 수많은 인명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하루에 주제 하나씩 100일간 맛보기를 추천한다.

이주현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