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조 해외펀드 판매한 증권사들
"투자자들 리스크에 직접 노출
충분한 의견수렴 없이 졸속 추진"
금융당국이 해외 자산운용사에 대한 국내 판매 규제를 풀겠다고 예고하자 기존 위탁 판매사인 증권사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투자자들이 상품 구조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투자하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게 증권사 우려다. 블랙스톤 등 ‘글로벌 공룡’들의 국내 시장 직접 진출을 허용하는 대형 규제 완화를 당국이 충분한 의견 수렴 없이 ‘속도전’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불만도 나온다.
◇ 기관투자가 리스크 관리 ‘비상’
2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최근 해외 자산운용사의 국내 펀드중개업 인가 신청 접수를 개시했다. 지금까지는 해외 운용사가 국내 투자자에게 해외 자산을 담은 역외 펀드를 판매하려면 펀드 중개업 자격을 갖춘 국내 증권사를 거쳐야 했다. 앞으로는 해외 운용사가 국내 자회사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직접 영업·판매에 나설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겠다는 게 당국 복안이다. 사실상 해외 대형 운용사의 국내 직접 진출을 허용하는 정책이다.
현재 증권사를 통해 위탁판매하는 해외 운용사의 펀드 규모는 연간 2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증권사들이 해외 운용사에서 받는 위탁판매 수수료는 연간 1500억원 수준이다. 시장 규모가 작지 않은 만큼 증권업계에선 블랙스톤, 블랙록, KKR 등 약 10곳의 대형 해외 운용사가 중개업 인가 신청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향후 개인투자자 등 리테일로까지 펀드 판매 범위를 넓혀갈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투자 리스크 관리다. 증권사들은 연기금 등 국내 기관투자가에 해외 펀드를 위탁판매하면서 완충 역할을 해왔다. 펀드 구성 자산의 수익성과 구조화 정도를 실사해 리스크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판매를 제한하는 식이다. 업계 관계자는 “해외 운용사들이 판매하는 펀드 중엔 기초자산이 불분명할 정도로 구조화된 상품이 적지 않다”며 “리스크 관리 파트너인 증권사의 역할이 사라지면 각종 연기금 등 기관이 그만큼 리스크에 노출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기관투자가가 해당 규제 완화 움직임을 꺼리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 대형 규제 완화 졸속 추진 논란도
당국이 이처럼 대형 규제 완화를 충분한 의견 수렴 없이 추진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이 사안이 처음 거론된 건 올해 1월 금융위의 ‘2025년 업무계획’에서다. ‘글로벌 자산운용사의 진입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국내 자회사의 펀드중개업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한 줄 포함된 게 전부다. 이후 업계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금융위가 ‘투자상품 다양화’를 규제 완화 이유로 들고 있지만 위탁판매하더라도 투자처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명분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최소한의 합리적 문턱조차 갖추지 않고 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최근 당국이 업계에 전달한 자회사 인가 자본요건을 보면 최저 자기자본이 5억원에 불과하다. 인력 요건 또한 투자자문 3명, 리스크 관리 1명, 내부 통제 1명, 전산 관리 1명 등 총 5명으로, 사실상 사무소 수준이다. 증권사 관계자는 “국내 중소 운용사도 자기자본이 수백억원 수준”이라며 “자기자본 5억원이면 안방 문을 최소한의 관리 요건도 없이 활짝 열어주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씨티금융지주 회장 출신인 하영구 블랙스톤 한국법인 회장이 규제 완화 추진에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난 22일에는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블랙스톤 뉴욕 본사를 찾아 스티븐 슈워츠먼 회장과 면담하고 해당 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