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제네시스 전시 일환으로 열린 서도호 작가의 전시 ‘서도호: 집을 걷다(Walk the House)’에 나온 ‘Nest/s’(2024)  ⓒ서도호, Tate Photography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제네시스 전시 일환으로 열린 서도호 작가의 전시 ‘서도호: 집을 걷다(Walk the House)’에 나온 ‘Nest/s’(2024) ⓒ서도호, Tate Photography
화창한 날씨와 늦은 일몰 덕에 5월의 런던은 그 자체로 축제 같은 분위기다. 흔히 영국을 잔뜩 흐린 비의 나라로 생각하지만 봄날의 런던은 이런 선입견을 깬다. 올해는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이 개관 25주년을 맞아 더 특별한 봄을 맞이했다.

서도호 작가
서도호 작가
테이트모던은 2000년 5월 11일 영국 정부가 추진한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관했다. 런던 템스강 남쪽 옛 뱅크사이드 발전소를 스위스 건축가 듀오 헤르조그 & 드 뫼롱이 리모델링한 공간으로 과거 산업 유산의 외형을 보존하면서 현대적 감각을 더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이 발전소는 원래 2차 세계대전 직후 런던 도심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지어졌고, 영국의 상징인 빨간 공중전화 부스를 디자인한 자일스 길버트 스콧이 설계했다.

25주년을 맞아 열린 특별 전시는 한국의 서도호 작가에게 초점을 맞췄다. ‘서도호: 집을 걷다(Walk the House)’ 전시는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포괄하는 대규모 서베이 전시다. 현대자동차 후원 ‘제네시스 展’의 일환으로 열린 이번 전시는 테이트모던 블러바트닉 빌딩 내부 전시 공간의 벽을 과감히 제거해 개방적인 구조로 구성됐다. 입구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작품은 300여 개의 장난감 병정이 조각의 좌대를 떠받치는 키네틱 아트 ‘공인들(Public Figures)’이다. 권위와 집단 정체성, 기념비적 상징에 대해 유쾌하게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전시 전체의 서사를 상징적으로 여는 장치다.

테이트모던, 서도호로 완성한 25년

이 밖에도 졸업앨범 등에서 수집한 수만 장의 얼굴 사진으로 만든 벽지 작품 ‘Who Am We?’(2000), 서울 성북동 한옥 외벽을 실물 크기로 탁본한 ‘러빙/러빙 프로젝트: 서울집(Rubbing/Loving Project: Seoul Home)’(2013~2022), 실제와 같은 크기의 반투명 천으로 재현한 공간 설치 작품 ‘Nest/s’(2024), ‘Perfect Home London, Horsham, New York, Berlin, Providence, Seoul’(2024) 등이 공개돼 작가의 ‘집’과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공간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지난 4월 30일 열린 전시 프리뷰는 놀라운 반응을 끌어냈다. 영국은 물론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미술계 저명인사가 대거 참석해 전시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줬다. 이번 전시는 제네시스가 테이트모던과 함께하는 글로벌 문화 협업 프로젝트 ‘제네시스 아트 이니셔티브(Genesis Art Initiative)’의 첫 번째 시도로, 그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사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계의 흐름을 반영하듯 작가를 대표하는 주요 갤러리인 리만머핀, STPI 싱가포르, 그리고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와의 협업 속에 이뤄졌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글로벌 미술 네트워크와의 유기적 연계를 통해 전시는 단순한 서베이를 넘어 동시대 예술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서도호가 어린 시절 살았던 한옥집을 탁본해 재현한 ‘Rubbing/Loving Project: Seoul Home’(2013~2022).  ⓒTate Photography
서도호가 어린 시절 살았던 한옥집을 탁본해 재현한 ‘Rubbing/Loving Project: Seoul Home’(2013~2022). ⓒTate Photography
전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Perfect Home: London, Horsham, New York, Berlin, Providence, Seoul’(2024)이다. 서도호 작가가 살아온 여섯 개 도시의 주거 공간을 실제 크기의 반투명 천 구조물로 구현한 설치작품으로, 그의 대표적 주제인 ‘이주’ ‘정체성’ ‘기억’이 집약돼 있다. 한국인 특유의 세심함과 장인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이 작품은 공간 속을 걸으며 숨은 그림을 찾듯 관람객이 안쪽으로 들어가 다양한 사물을 발견해 나가는 참여형 관람 경험을 제공한다. 일상적인 물건 하나하나가 작가의 기억과 연결된 실체로 등장하며, 단순한 집의 재현을 넘어 존재의 흔적과 의미를 탐색하게 한다.

‘K-CRAFT’로 본 韓의 문화 경쟁력

5월은 런던이 공예로 물드는 계절이다. 매년 이 시기에 열리는 ‘런던 크래프트 위크’는 도시 전역을 무대로 공예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 행사는 2015년 패션계에서 오랜 시간 활동한 가이 솔터가 기획했으며, 공예를 현대 도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겠다는 뚜렷한 취지로 출발했다. 올해로 11년을 맞은 런던 공예 주간은 단단한 글로벌 행사로 성장했다.

런던 크래프트 위크에 소개된 
은 상감 잔상화병. 국가유산진흥원
런던 크래프트 위크에 소개된 은 상감 잔상화병. 국가유산진흥원
전통적인 공예 공방과 작가 스튜디오는 물론이고 백화점, 호텔, 레스토랑 같은 상업적 공간과 협업해 공예적 요소를 생활 전반으로 확장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올해는 특히 크리스티경매장을 시작으로 빅토리아앤드앨버트박물관, 그리고 상업 갤러리가 모여 있는 코크스트리트 등에서 수준 높은 전시들이 열려 큰 주목을 받았다.

한국의 공예 주간 역시 런던 공예 주간을 벤치마킹해 시작된 행사로 그 뿌리가 이곳 런던에 있다. 한국 공예는 최근 몇 년간 국제무대에서 점점 더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국내 기반의 솔루나아트그룹은 올해로 3년 연속 런던 공예 주간에 참여했다. 영국 문화재로 지정된 유서 깊은 공간 더 레이버리(옛 크롬웰 플레이스)에서 한국 공예를 대표하는 이규홍(유리), 정다혜(말총), 최기용(유리), 편예린(도자), 천우선(금속) 작가와 함께 전시를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한국 전통 공예의 뿌리 깊은 정성과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구성돼 글로벌 관객들에게 한국 공예의 섬세함과 예술성을 인상 깊게 전달했다. 런던이라는 국제 문화의 중심지에서 한국 공예가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와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말총에서 매듭 장신구, 누비 스카프까지

런던 크래프트 위크에 소개된 
편예린 작가의 작품. 솔루나아트그룹 제공
런던 크래프트 위크에 소개된 편예린 작가의 작품. 솔루나아트그룹 제공
올해는 국가유산청 산하 국가유산진흥원이 런던 공예 주간에 자체 기획 상품으로 처음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K-CRAFT를 런던에서’라는 목표 아래 한국의 전통 공예 기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상품을 선보였다. 장인의 손길이 깃든 전통 부채, 매듭 장신구, 누비 스카프 등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공예품은 단순한 전시를 넘어 한국 공예의 우수성과 고유한 미감을 알리는 중요한 시도로 평가됐다.

이처럼 한국은 공공기관, 민간 갤러리, 작가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함으로써 런던 공예 주간에서 점차 존재감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전통과 현대, 제도와 창작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은 한국 공예의 동시대적 가치와 국제적 경쟁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영국 언론계의 거장이자 세계적인 패션 평론가인 수지 멩키스 역시 한국 공예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런던=조혜영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