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잠들지 않아. 여인들과 쾌락이 있는 한. 쾌락,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양팔로 여자를 감싸안은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올 쾌락의 대가를 까맣게 모른 채 노래를 부른다. 스페인의 젊은 귀족, 돈 주앙의 이야기다. 여자를 하룻밤 상대로만 여기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던 돈 주앙은 어느 날 깊은 사랑에 빠져버리는 저주에 걸리게 되는데….
사진=마스트인터내셔널
사진=마스트인터내셔널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내한공연 중인 프랑스 뮤지컬 '돈 주앙'은 스페인 고전 속 인물인 희대의 카사노바, 돈 주앙의 삶과 사랑을 그린 뮤지컬이다. 배경은 정열의 도시 스페인 세비야. 배우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노래를 부르지만, 스페인 뮤지션들이 중간중간 집시풍의 흥겨운 노래를 선사한다. 프랑스 뮤지컬 연출 방식에 따라 대사 없이 노래로만 흘러가는 '송스루(sung-through)'로 37개 넘버(뮤지컬 속 노래)가 무대를 채운다.

돈 주앙이 사랑에 빠지는 상대는 약혼자를 둔 여자 마리아다. 마리아 역시 돈 주앙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약혼녀를 빼앗긴 라파엘은 돈 주앙에게 죽음을 불사한 결투를 신청한다. 돈 주앙의 아버지, 친구, 심지어 마리아까지 돈 주앙을 말리지만 결국 그는 칼을 뽑아든다. 그 선택은 사랑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과도한 자기애가 불러온 최후였을까.

돈 주앙 역은 치명적 매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배우, 지안 마르코 스키아레띠가 맡았다. 그는 2021년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내한공연 당시에도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마리아와 엘비라(돈 주앙의 약혼녀)역을 소화한 배우들도 프랑스어 특유의 낭만적 울림과 음색으로 색다른 매력을 풍겼다.
뮤지컬 '돈 주앙'에서 댄서들이 플라멩코를 추고 있다./사진=마스트인터내셔널
뮤지컬 '돈 주앙'에서 댄서들이 플라멩코를 추고 있다./사진=마스트인터내셔널
무대는 초대형 LED(발광다이오드)와 화려한 조명으로 채워졌다. 다만 세비야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연출은 기대에 못 미쳐 다소 아쉬웠다. 전설 속 이야기를 그리기 위한 장치로 하얀 연기를 사용했는데, 빈도가 잦아 다채롭지 않다는 인상도 있었다.

뮤지컬의 완성도와 별개로, 미동 없이 감상하는 국내의 '시체 관극' 문화 때문에 공연의 에너지를 온전히 만끽할 수 없는 것도 안타까웠다. 객석에선 움직임을 최대한 절제한 채,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는 관객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집시풍 노래와 플라멩코 춤이 그만큼 흥겨웠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런 한국의 뮤지컬 관람 문화를 감안한 것인지, 관객들이 일어서는 커튼콜에선 배우와 댄서들이 탭댄스 군무를 선보여 아쉬운 마음을 달래줬다.

19년 만의 이번 내한공연은 오는 13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관람할 수 있다. 이후로는 대구(4월 18~20일)와 부산(4월 25~27일)에서 각각 공연한다.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