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가 지은 부자들 위한 집엔
현재 빈자들이 살고 있어
'지금은 피카소가 뭐라고 할까?'
가우디를 비난한 피카소
카사 비센스에 이어 구엘 저택까지 완성한 가우디는 유명해졌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건축 세계를 선보인 그를 모두가 주목한 것이다. 일거리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할 필요가 없었다. 구엘 덕분에 알게 된 저명인사들이 건축을 의뢰하기 위해 그를 찾았다.
이즈음 가우디를 속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가 부자들을 상대하면서 가진 자들의 허세를 채워주기 위해 호화로운 집을 짓는 일에만 열을 올린다는 비판이었다. 젊은 예술가들이 그 선봉에 섰다. 이 중에는 피카소도 있었다. 열네 살 때 화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바르셀로나로 옮겨온 피카소는 구엘 저택 맞은편에 살며 미술 학교에 다녔다.
피카소가 젊은 시절 그린 펜화 한 점이 있다. 가우디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이 작품의 제목은 ‘Hunger(굶주림)’. 왼쪽 아래 초라한 행색의 한 가족이 서 있다. 엄마 품에는 아기가 보인다. 가운데 언덕 위에는 턱수염을 기른 어떤 사내가 연설 중이다.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대단히 중요한 하느님과 예술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자 가족을 대표해서 아빠가 대답한다. “네, 원하신다면 하느님과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십시오. 하지만 제 자식들은 지금 배가 너무 고픕니다.” 부자들을 위해 일하면서 보수적인 가톨릭교회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가우디를 턱수염을 기른 사내로 묘사해 조롱한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Hunger(굶주림)’, 1902년, 종이에 펜과 잉크, 13.5cm x 21.1cm,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피카소는 부자들의 집만 짓는다는 이유로 가우디를 몹시 경멸했다. / ⓒ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그러나 가우디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시골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예술과 달리 건축은 돈이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장르였기에 부자들을 상대했을 뿐이다. 건축은 건축주의 의뢰가 없으면 어떤 집도 지을 수가 없다. 건축주가 자기 마음에 드는 집을 지으려면 땅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한다. 건축주의 취향을 고려하고 비위를 맞추면서도 자신만의 철학을 고수하고 소신을 관철해내는 것은 모든 건축가의 숙명이다.
산업혁명의 상징이었던 마타로 노동자 협동조합의 굴뚝. 가우디는 노동자들의 친구인 동시에 부자들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부자의 건축과 빈자의 건축에 차등을 두지 않았다. / 사진. ⓒ 김혜경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가 진행된 도시다. 도처에 공장이 들어서고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다. 노동자들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는 열악했다. 이즈음 협동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살바도르 파제스는 카탈루냐 협동조합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가우디와 두터운 친분을 쌓은 사이였다. 가우디는 1878년 공장과 주거 단지를 설계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파제스에 의해 설립된 노동자 협동조합은 그라시아에 있다가 1874년 마타로로 이전했으나 충분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파제스와 가우디는 마타로 노동자 협동조합(Cooperativa La Obrera Mataronense) 단지 안에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대한 꿈을 담아내고자 했다. 노동자들이 일하고 생활하며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작은 도시였다. 설계도에는 공장 건물과 노동자들의 단독 주택, 정원이 딸린 카지노와 학교, 도서관을 비롯한 각종 건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건축은 이상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가우디는 1878년부터 1885년까지 이 원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면화 표백 작업장과 서비스 시설 그리고 몇 채의 주택만 짓는 데 그쳤다. 그나마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은 면화 표백 작업장뿐이다. 이 작업장에서 가우디는 처음으로 포물선 아치를 사용했다. 격변의 세월 속에 방치되던 이 건물은 지방자치단체가 인수해 2008년에 복원되었으며, 2010년부터는 바사트 컬렉션의 전시 공간인 마타로 현대미술관 컨소시엄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마타로 노동자 협동조합 단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면화 표백 작업장. 복원을 거쳐 현재는 바사트 컬렉션의 전시 공간인 마타로 현대미술관 컨소시엄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 사진. ⓒ 김혜경사랑, 일생에 단 한 번 찾아온
‘나우 가우디(Nau Gaudí)’로 불리는 예전의 마타로 노동자 협동조합 면화 표백 작업장은 마타로 역에서 도보로 10여 분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아마도 가우디 건축물 중 가장 소박한 건물일 것이다. 내부는 중간중간 기둥을 세우지 않고 포물선 아치가 나란히 보로 연결되어 있어 시원하면서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가우디는 비싼 원목이 아니라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합판을 세 겹으로 이어 아치를 만들었다. 덕분에 넓은 실내 공간이 답답하지 않고 탁 트인 개방감을 준다.
나무를 이어 만든 포물선 아치는 실내에 열두 개가 설치되어 있다. 기독교에서 숫자 12는 완전한 수로 여겨진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파도 열두 개였고, 예수의 제자도 열두 명이었다. 가우디는 열두 개의 포물선 아치를 통해 각기 다른 생각과 이상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노동조합의 정신처럼 완전한 질서를 구축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나우 가우디(Nau Gaudí)’의 내부. 장식이 전혀 없이 외벽은 벽돌을 쌓아 올렸고, 천장은 맞배지붕을 따라 나무로 이었다. 나무를 볼트로 조여 잇댄 포물선 아치가 단연 돋보인다. / 사진. ⓒ 김혜경
마타로 노동자 협동조합 단지가 건설될 때 가우디는 사무실을 꾸려 건축가로서 새 출발 하느라 분주한 와중에도 마타로를 자주 오갔다. 한 여성을 마음에 품은 탓이었다. 그녀는 단지에 있는 학교 교사였던 오거스티나 모레우(Agustina Moreu)였다. 페페타라고도 불렸다. 가우디는 단숨에 페페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자신과는 성격이나 사고방식이 매우 달랐지만, 그것이 오히려 마음을 끌어당겼다.
소심한 가우디의 마음을 훔쳐 짝사랑에 애태우게 만든 여인, 페페타는 누구일까?
그녀는 1857년 마타로에 있는 한 부잣집 맏딸로 태어났으나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 끝에 남편과 헤어진 뒤 마타로 노동자 협동조합에 있는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살았다. 아들마저 세 살 무렵 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이혼녀였다.
그러나 가우디의 눈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아무 상관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페페타는 발랄하고 생동감 넘치는 사랑스러운 여인일 뿐이었다. 페페타는 당대 여성들의 기본적인 관습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에 예술적 안목도 높았고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정치 문제에 관심도 깊었다. 가우디는 일요일마다 조카 딸을 데리고 모레우 가문을 찾아가 페페타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페페타의 가족과는 갈수록 친분이 두터워졌으나 정작 그녀와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가우디는 건축 현장에만 가면 열정과 박력이 솟구쳤지만, 마음을 빼앗긴 여자 앞에서는 얼굴만 붉히며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마타로 노동자 협동조합 단지가 완성될 때까지 그녀와 제대로 데이트 한번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마침내 가우디는 결심했다. 건축이 끝나면 그녀를 더 보기 힘들어질 것이기에 고백하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어느 날 그는 페페타에게 몬주익 언덕으로 산책하러 가자고 했다. ‘유대인의 산’이라는 뜻의 몬주익(Montjuic)은 지금은 호안 미로 미술관과 국립 카탈루냐 미술관 등이 자리해 있고, 한국인에게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순간이 기억나는 공간이지만, 그때는 몬주익성을 중심으로 나지막하고 전망이 좋아 연인들이 산책하기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온 말인데…… 페페타, 나는 그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가우디의 심장이 얼마나 요동치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페페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렵게 말씀하셨을 텐데…… 정말 죄송해요. 저는 이미 약혼한 사람이 있답니다.”
그녀는 약혼 반지를 보여주었다. 가우디는 충격을 받았다. 평소 친절하기 그지없던 그녀에게 거절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페페타는 마타로의 유명 건축가 손자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페페타는 먼저 몬주익 언덕을 내려가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가우디의 마음은 처참히 무너져내렸다. 열렬했던 짝사랑은 이렇게 끝났다. 실연의 상처는 깊었다. 그 뒤 다시는 마타로를 찾지 않았다. 한번은 페페타가 친구를 만나러 구엘 공원을 간 적 있는데, 그곳에 있던 가우디가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쇠처럼 합판을 연결해 포물선 아치를 완성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원형 아치가 하트의 반쪽으로 보여 가우디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애달파 하는 듯 느껴졌다. / 사진. ⓒ 김혜경끊이지 않는 아이들의 함박웃음
가우디 작품 중 마타로 노동자 협동조합 단지와 더불어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지은 건물이 간두세르 거리(Carrer de Ganduxer) 85번지에 있는 산타 테레사 학교(Collegi Santa Teresa)다. 그는 사랑을 잃은 뒤 더욱 일에 파묻혀 살았다. 건축은 살아가는 힘이자 생의 의지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소 신부에게서 연락이 왔다. 학교를 지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오소 신부는 가톨릭 사제인 동시에 교육자였다. 그는 여성의 가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별히 예수의 테레사라고 불리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a de Jesús, 1515~1582)를 숭모했다. 1876년에는 여성 교육을 위한 수도회인 성녀 테레사 수도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가 열린 1888년 그가 가우디에게 의뢰해 건축하게 된 학교는 경제적인 조건이 꽤 엄격했다. 예산이 적어 가능한 한 검소하게 지어야 했다.
난관은 또 있었다. 알고 보니 호안 밥티스타 폰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착공이 이루어져 기초 공사가 끝난 상태였다. 오소 신부가 중간에 건축가를 가우디로 바꾼 것이다. 그는 신앙심이 남다른 데다 명성이 치솟고 있는 가우디가 이 일에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가우디는 가난의 서약을 준수해야 했다. 비용을 최소로 절감해 수수하게 지어야 한다는 것이 수도회의 바람이었다. 가우디는 돌과 붉은 벽돌을 이용해 간소하게 건축을 진행하면서도 수도회의 정신을 살리고 학교의 특색을 반영하기 위해 여러 상징적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돌담 밖에서 본 산타 테레사 학교 측면. 톱니 모양의 꼭대기에는 교회 박사였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를 상징하는 박사 모자가 장식되어 있으며 가운데에는 종탑이 세워져 있다. / 사진. ⓒ 김혜경
건물 모서리 벽돌 첨탑 위에는 붉은색 도자기로 만들어진 네 개의 팔이 달린 십자가가 얹혀 있다. 때마침 열린 호안 미로와 피카소 전시회를 알리는 플랜카드가 바람에 펄럭인다. / 사진. ⓒ 김혜경
학교 건물은 4층으로 구성되었다. 최상층은 박사 모자를 얹힌 톱니 모양의 삼각형 꼭대기가 나란히 자리하도록 배열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작가였으며 여성 최초의 교회 박사였다. 입구는 벽돌 아치 아래 납으로 주조한 기하학적 문양의 견고한 문이 세워져 있다. 우뚝 솟은 십자가 밑에 카르멜산 모형이 보인다. 성녀 테레사는 카르멜 수녀원의 쇄신과 개혁에 힘썼으며 여러 곳에 카르멜 수도원을 세웠다. 엘리야는 폭군인 북이스라엘왕국 아합왕에게 맞서 카르멜산에서 기도로 하느님의 기적을 보여줌으로써 승리를 얻어낸 구약의 용맹한 선지자였다. 그 기적의 현장이 카르멜산이었기에 카르멜산은 카르멜 수도원의 문장이 되었다. 좌우에는 가시관을 쓴 예수의 심장과 불화살이 박힌 성녀 테레사의 심장이 사랑의 불꽃을 발하고 있으며, 그 아래 카르멜산의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는 별 모양이 박혀 있다.
첨탑 아래 박사 모자, 엘리야의 기적이 일어난 카르멜산 상징, 가시관을 쓴 예수의 심장, 불화살이 박힌 성녀 테레사의 심장, 예수를 뜻하는 IHS가 새겨진 심장이 장식되어 있다. / 사진. ⓒ 김혜경
1890년 5월, 수녀들과 학생들이 처음 공부와 수련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이 학교는 변함없이 그 기능을 수행해 왔다. 현재 이 학교는 유아 교육 2차 과정부터 학사 과정까지 정규 교육의 모든 과정을 제공하고 있으며, 개교할 때는 수녀와 여학생만 다니는 학교였지만 20세기 말부터 남녀공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쉬운 건 이곳이 학교인 까닭에 관광객들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학교 주위를 빙빙 돌며 바깥 풍경만 감상했다. 서운함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돌담 너머로 아이들의 함박웃음이 들려왔다. 담장 위로 올라가 학교 안을 들여다봤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소나무와 야자수가 우거진 정원도 인상적이었다.
가우디의 아픈 사랑을 간직한 나우 가우디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가우디의 고백이 받아들여졌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우디가 페페타와 가정을 이루어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운동장에서 뛰노는 저 아이들처럼 자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과연 전 세계인들이 우러러보는 불멸의 건축가가 될 수 있었을까? 분명한 것 하나는 피카소가 부자들을 위한 집만 짓는다며 그토록 비난했던 가우디가 남긴 불후의 걸작들 덕분에 오늘날 바르셀로나에 있는 수많은 소시민과 자영업자가 먹고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자들을 위해 집을 지었지만, 그 집들 덕분에 빈자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피카소는 뭐라고 말할까? 아마 120여 년 전에 그렸던 펜화를 다시 그릴지도 모르겠다.
가우디는 정원을 설계해 소나무와 야자수 등을 심었고, 구엘 공원을 연상시키는 길과 돌 벤치를 만들었다. 궂은 날임에도 아이들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공 놀이에 정신이 없었다. / 사진. ⓒ 김혜경
유승준 작가